中 추격에 투자 경쟁 격화…자금조달 부담은 모회사·계열사로

중국의 기술 추격은 빨라지는데 국내 기업들의 투자 실탄 확보에는 제동이 걸렸다. 정치권과 금융당국이 주주보호에 무게를 두면서 기업의 자금조달 선택지가 좁아질 수 있다는 우려다. 글로벌 첨단산업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미래 성장동력 확보에도 먹구름이 드리웠다.
27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가 23일 미국 낸드플래시 자회사 솔리다임의 미국 증시 상장 및 사전 투자유치 검토를 중단하면서 중복상장 규제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회사는 자본시장 여건 등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밝혔지만 대규모 설비투자를 위한 자금조달 전략에는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이번 결정에 앞서 정치권과 금융당국은 중복상장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은 19일 국정감사에서 솔리다임 상장이 중복상장 규제에 저촉된다는 판단을 밝혔다. 이어 이억원 금융위원장도 22일 솔리다임을 중복상장 가이드라인 적용 대상으로 지목하며 SK하이닉스와 SK스퀘어에 주주보호를 위한 5대 의무가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비슷한 사례는 올해 초에도 있었다. LS그룹은 1월 미국 권선 제조업체 에식스솔루션즈의 상장 신청을 철회했다. 기존 LS 주주들이 중복상장에 따른 기업가치 희석을 우려하며 반발한 데 이어 이재명 대통령까지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LS는 상장을 통해 약 5000억원을 조달해 미국 생산시설 증설에 투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무산되면서 기존 재무적투자자(FI)들과 새로운 자금조달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문제는 자금조달 계획이 바뀌더라도 투자 수요는 그대로라는 점이다. 솔리다임은 AI 데이터센터용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시장 확대에 대응해야 한다. 중국 창신메모리(CXMT)와 양쯔메모리(YMTC)의 기술 추격 속에 생산능력 확충과 첨단 공정 확보도 시급하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규제도 부담이다. 솔리다임의 핵심 생산거점인 중국 다롄 공장은 미국산 장비 반입에 매년 허가를 받아야 한다. 미국 내 신규 낸드 생산시설 확보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는 여전히 숙제다. 자금 확보가 늦어지면 중국 공장에 대한 의존도가 장기화할 가능성도 있다.
자금조달 부담이 모회사와 그룹 계열사로 옮겨갈 가능성도 주목된다. 한화투자증권에 따르면 SK㈜와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이 솔리다임 지배회사인 낸드프로덕트솔루션즈(NPS)에 약정한 출자금은 총 11억1000만달러다. 향후 추가 투자재원까지 자체 현금이나 차입으로 충당한다면 그룹 전체의 자본배분 부담이 커질 수 있다. 다만 해당 출자금은 상장 검토 중단 이전에 약정된 금액이다.
외부자본 유치가 어려워질 경우 모회사 직접투자와 회사채 발행, 금융권 차입 등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차입 확대는 이자비용을 늘리고 자체 현금 투입은 다른 성장사업에 사용할 재원을 줄인다. 대규모 설비투자는 자금 확보 시점에 따라 사업 일정까지 달라질 수 있다. 자회사 지분 희석을 막더라도 투자비용을 기존 주주가 간접적으로 부담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중복상장에 따른 모회사 기업가치 할인과 일반주주 이익 훼손 우려도 간과할 수 없다. 다만 솔리다임과 에식스솔루션즈는 기존 사업을 단순 물적분할한 기업이 아니라 해외에서 인수한 사업을 기반으로 한다. 자회사 설립 경위와 투자 목적, 주주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구분해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다.
증권가의 시선은 SK하이닉스의 투자재원 배분과 주주환원 정책으로 향하고 있다. 28일 예정된 3분기 실적발표에서는 솔리다임의 성장 투자와 기존 주주환원을 어떻게 병행할지가 주요 관전 요소로 꼽힌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솔리다임의 성장성이나 투자 필요성에는 변화가 없다고 분석한다”며 “이번 상장 검토 중단이 주주환원 정책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28일 실적설명회에서 기존 예상을 넘어서는 구체적인 주주환원 방안이 제시될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