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해외 브랜드 ‘총판 소모전’...사라진 정부의 역할

입력 2026-09-2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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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선 경제정책부장
▲석유선 경제정책부장
글로벌 러닝 스포츠 브랜드 ‘호카(HOKA)’의 국내 총판권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내 인지도가 전무했던 해외 브랜드를 바닥에서부터 일궈 수백억원대 브랜드로 키워낸 중소 유통사 조이웍스와 미국 본사 데커스 간 국제중재가 한창인 가운데 변수가 생겼다. 이랜드가 신규 파트너로 등장하면서 전선이 국내 기업 간 갈등으로 번진 것이다. 이를 두고 업계 안팎에서는 중소기업의 생존권 침해나 대기업의 무리한 사업 확장이라는 날선 비판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사안의 본질은 특정 기업의 ‘도의적 잘잘못’에 머물지 않는다. 해외 브랜드의 국내 독점 총판권을 차지하기 위해 국내 기업들이 벌이는 고질적인 출혈 경쟁과 이 과정에서 국내 자본과 노하우가 허무하게 증발하는 기형적 유통 생태계의 구조적 모순이 핵심이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해외 본사의 지배력 아래 놓인 판권 쟁탈전은 국내 기업 어디에도 실질적인 득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국내 시장에서 ‘해외 브랜드 잔혹사’는 계속 반복돼 왔다. 국내 기업이 막대한 자본과 마케팅 역량을 쏟아 해외 브랜드를 안착시키면 인지도가 정점에 달하는 순간 해외 본사가 직진출을 선언하거나,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다른 유통사와 계약을 맺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랜드 역시 수십 년간 공들여 키운 ‘뉴발란스’의 본사가 국내 직진출을 선언하면서 피해를 본 사례 중 하나다. 그러나 이랜드는 그 돌파구로 또 다른 국내 기업이 어렵게 일군 텃밭을 택했다. 또다시 국내 기업끼리 제 살을 깎는 악순환에 빠지는 ‘치킨 게임’이 반복된 것이다.

이런 소모전이 반복되는 동안 정부는 무엇을 했나. 산업통상부·공정거래위원회·중소벤처기업부 등 관련 부처의 오랜 태도는 ‘민간 계약 불간섭’을 앞세운 무기력한 방관이었다. 국경을 넘나드는 총판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사기업의 영역’이라며 선을 긋기에 바빴다. 글로벌 본사의 일방적인 지위 남용이나 계약 종료 위협에 직면해도 국내 기업들은 거액의 소송 비용이 드는 국제중재와 해외 소송을 오롯이 각자도생으로 감당해야 했다.

물론 정부가 민간 계약의 본안이나 국제중재 결과에 함부로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글로벌 본사와 국내 대리상 간 정보 비대칭과 교섭력 격차를 방치하는 것은 시장 존중이 아니라 ‘행정적 직무유기’다.

무엇보다 국내 유통사가 초기 위험을 감수하며 시장을 개척하고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린 ‘무형적 기여’를 법·제도적으로 보호할 안전판이 전무하다는 것이 문제다. 독일·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은 상업대리상 보호 규정을 통해 본사가 정당한 이유 없이 계약을 해지할 경우 고객 기반 확대에 따른 보상금(Goodwill Indemnity) 지급을 의무화하고 있다. 반면 우리 기업들은 계약서에 관련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유통망 구축과 마케팅 노하우, 충성 고객 확보 등 무형의 자산을 통째로 빼앗겨도 손쓸 방도가 없다.

정부의 정책적 개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돼야 한다. 우선 해외 본사와의 계약 시 일방적인 해지 통보 방지, 최소 계약기간 보장, 투자비 회수 장치, 고객 데이터 및 영업권 귀속 등을 명문화한 ‘글로벌 유통 표준계약서’ 가이드라인을 제정·보급해야 한다. 둘째, 대리점법 및 불공정거래행위 심사지침을 정비해 글로벌 본사의 부당한 거래조건 강요, 직진출을 빌미로 한 영업권 침탈 등을 엄정히 감시해야 한다. 셋째, 해외 법률 분쟁 대응력이 취약한 중소·중견기업을 위해 국제중재 전문 법률 지원과 통번역, 분쟁조정 펀드 등 실질적인 안전판을 제공해야 한다.

정부의 무관심과 제도적 공백이 계속되면 해외 브랜드 판권을 둘러싼 우리 기업 간 소모적 골육상쟁은 제2, 제3의 호카 사태로 되풀이될 뿐이다. 국내 소비재 시장이 글로벌 자본의 변덕에 휘둘리는 ‘하청기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정부가 이제라도 공정한 룰을 세우는 심판관으로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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