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량 보였지만 복지 추론엔 한계
성장보다 번영 재는 도구 절실해져

1934년 1월, 사이먼 쿠즈네츠는 훗날 국내총생산(GDP)으로 불려지는 도구를 미국 상원에 건넸다. 그리고 같은 보고서에서 경고했다. 이 숫자는 삶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를 말해 줄 수 없다고. 이런 경고는 바로 그 보고서 안에 있었지만, 우리는 90년 동안 마치 그런 경고가 없던 것처럼 행동해 왔다.
1934년 나라는 대공황 4년째였고,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누구도 정확히 말하지 못했다. 열여덟 달 전 상원은 숫자 하나를 요구했다. 그 작업을 이끈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가 이제 그 숫자를 손에 쥐고 있었다.
쿠즈네츠가 미국에 온 지는 겨우 12년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핀스크에서 태어난 그는 1922년 미국에 도착해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고, 5년 뒤 미국경제연구소(NBER)에 합류했다. 그는 맥락 없는 숫자를 불신하는 통계학자였다. 경제는 역사와 인구, 사회와 함께 읽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거의 40년 뒤, 그는 노벨상을 받게 된다.
당시 그의 보고서는 미국의 소득이 3년 만에 약 830억달러에서 400억달러로, 대략 절반으로 줄었음을 보여 주었다. 한 나라가 자기 경제의 전체 모습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숫자를 만들어 낸 방법이 오늘날 우리가 국내총생산(GDP)이라고 부르는 것의 전신이다.
같은 문서 안에는 주의 문구 하나가 묻혀 있었다. 한 나라의 복지는 국민소득 측정으로는 거의 추론할 수 없다고 쿠즈네츠는 썼다. 그는 도구를 만들었고, 같은 페이지에서 그 도구의 한계선을 그었다. 이 숫자는 생산을 측정했다. 삶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는 측정하지 않았다. 경고는 최초의 문서 안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그 경고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 왔다.
이 도구는 너무나 유용해서 단박에 주목을 끌었다. 국가 간, 분기 간 비교가 가능한 단일한 수치가 생겼고, 재무장관들은 예의주시해야만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이 숫자는 전후 질서의 체계 안에 자리잡았고, 한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단순한 측정 도구가 아닌, 국정 운영의 목적 그 자체가 되었다. 정부는 더 이상 경제성장을 집계해 발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정권의 운명이 경제성장의 성패에 따라 갈리게 되었다.
오랫동안 이 대리 지표는 유효했다. 생산량이 증가한다는 것은 실제로 아이들의 사망률이 낮아지고, 지붕 누수가 줄어들며, 교육을 받는 기간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했다. 나라가 가난했을 때는 경제 지표와 삶의 질이 함께 움직였기에, 하나를 다른 하나의 대리 지표로 삼는 것은 타당했다.
그리고 이 숫자를 원한 것은 정부만이 아니었다. 숫자는 기자가 헤드라인에 올릴 수 있는 것이고, 야당이 한 마디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이며, 독자가 뉴스에서 기억에 남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관들도 숫자를 원하고, 편집자도 숫자를 원한다. 시장 역시 아침 8시 반까지 숫자가 나오기를 원한다. 그들 중 누구도 ‘상황이 복잡하다’고 설명하는 긴 얘기는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숫자를 좇는다. 그리고 그 숫자가 대신했던 본질은 조용히 방치된다.
그러다 숫자와 삶이 갈라졌다. 모든 곳에서가 아니라, 이론상 갈라지지 말아야 할 바로 그곳에서. 갤럽에 따르면 세계 전체로는 2005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번영하고 있다(thriving)’고 답하는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 아직 가난한 경제에서 ‘성장’은 여전히 예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부유한 경제에서는 그 역할이 멈췄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자기 삶을 ‘번영’으로 분류될 만큼 좋게 평가한 근로자의 비율은 2010년대 내내 59~62%를 유지했다. 2024년에는 52%로 떨어졌다. 갤럽이 이 지역을 추적한 이래 가장 가파른 하락이었다. 그 기간 내내 산출은 늘었다. 세계적으로 일에 몰입하고 있는 근로자는 다섯 명 중 한 명 남짓에 불과하다.
세계는 성장했다. 그러나 번영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성장에 반대하는 주장이 아니며, 쿠즈네츠가 틀렸다는 주장도 아니다. 그는 옳았고, 가장 먼저 그렇게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지형에 들어섰음에도 여전히 낡은 지도를 사용하고 있음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알아챈 사람은 있었다. 1989년 여름, 한 파키스탄 경제학자가 핀란드에 있는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경쟁할 숫자 하나를 함께 만들자는 부탁이었다. 나라가 무엇을 생산하는지가 아니라, 그 국민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재는 숫자를.
그 시도는 성공했다. 바로 그 점이, 우리가 우려해야 할 향후 이야기의 대목이다.
◇아이만 엘 타라비시(Ayman El Tarabishy)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 교수는 세계중소기업학회(ICSB) 회장 겸 CEO이자 ‘Journal of Small Business Management’ 편집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인간중심 기업가정신(Human-Centered Entrepreneurship) 프레임워크의 공동 창시자로, 기업가정신을 비롯해 사회적 혁신, 창의성, 지속가능경영(ESG) 및 공정 성장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이다. 유엔 ‘중소기업의 날’(6월 27일)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정리=김기찬 프레지던트대 국제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