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봄 하버드대 인간번영프로그램과 베일러대, 갤럽이 22개국 20만 7천 명을 5년간 추적하는 글로벌 번영연구의 첫 결과를 내놓았다. 결과는 상식을 뒤집었다. 가장 번영하는 나라는 미국도 스웨덴도 아닌 인도네시아였다. 10점 만점에 8.47점.
꼴찌는 세계 4위 경제 대국 일본, 5.93점이었고 차하위와도 0.66점 차이로 홀로 낮았다. 일본인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삶의 의미였다. 더 무거운 발견도 있었다. 많은 나라에서 청년의 번영이 중장년보다 낮았다. 나이가 들수록 행복이 U자로 회복된다는 통념과 달리 번영은 청년기에 낮게 시작해 50세가 넘어서야 올라갔다. 격차가 가장 큰 미국에서 18~29세는 5.68점, 60대는 8.06점이었다.
두 개의 한국, 그 사이에 선 청년
한국은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답을 내는 자료가 있다. 43개 경제권을 비교한 사람중심기업가정신지수(HCE Index 2026)에서 한국은 기업가정신 2위, 위험감수 1위, 혁신 3위다. 그런데 같은 표에서 인간의 번영은 26위, 일터 몰입은 27위, 현재와 미래의 삶 평가는 31위로 내려앉는다.
몰입한 직원은 100명 중 14명, 미국은 31명이다. 부유해서 눈이 높아진 것도 아니다. 한국보다 가난한 17개 경제권의 국민이 자기 삶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경제의 한국은 1·2·3위, 삶의 한국은 26·27·31위다. 두 개의 한국이 있고 그 사이에 청년이 서 있다.
올해 8월 전체 취업자는 18만 4천 명 늘었지만 청년 취업자는 46개월째 줄었고, 쉬는 청년은 1월에 46만 9천 명으로 5년 만의 최고치였다. 첫 직장에 들어간 청년의 평균 근속은 1년 6.8개월, 떠난 이유 1위는 근로여건 불만족 44.4%다. 청년이 잃는 것은 일자리 이전에 일자리 안의 경험이고, 그 경험 이전에 내 잠재력이 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인간번영PERMA는 개인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아…기업이 인간번영을 만드는 동인은 '3E'
하버드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얼마나 생산했고 얼마나 벌었는가를 물어 왔다. 이제 사람은 얼마나 잘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번영은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다. 긍정심리학의 마틴 셀리그만은 사람이 잠재력이 꽃피는 인간번의 다섯 경험을 PERMA로 정리했다. 긍정정서(P), 몰입(E), 관계(R), 의미(M), 성취(A)다.
하버드의 타일러 밴더윌교수는 여기에 건강과 성품과 물질적 안정을 더해 삶의 모든 측면이 좋은 상태를 잰다. PERMA가 개인이 어떻게 심리적으로 잘 살아가는가를 묻는다면, 하버드 글로벌 번영연구는 인간이 공동체 안에서 존엄을 지키며 어떻게 온전하게 살아가는가를 묻는다.
둘 다 결과다. 그렇다면 누가 그 결과를 만드는가.
여기에 사람중심 기업가정신의 3E가 있다.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공감(Empathy), 강점을 실제로 발휘하게 하는 역량활성화(Enablement),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하는 권한부여(Empowerment)다. 3E은 인간번영의 동인이다.
PERMA와 하버드 글로벌 번영연구는 사람이 꽃핀 모습을 재는 자라면, 3E는 그 꽃이 피어날 토양이자 기업이 번영을 만드는 동인이다. 공감은 긍정정서와 관계를, 역량활성화는 몰입과 성취를, 권한부여는 몰입과 의미와 성취를 만든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존중받지 못하는 일터에서 긍정정서는 지속되지 않고, 강점을 쓸 기회가 없으면 몰입은 깊어지지 않으며, 자율성이 없으면 의미와 성취는 발현되지 않는다. 청년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열정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없는 이유다. 한국은 3E 중 역량활성화(64.1점)만 갖췄다. 공감(43.9점)과 권한부여(24.1점)가 비어 있다. 일자리는 있는데 존중과 권한이 없고, 그래서 청년의 내일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다. 하버드가 세계에서 본 것을 우리는 3E 세 숫자에서 본다.
잠재력은 뽑는 것이 아니라 피우는 것
기업들은 청년을 직원으로 뽑아 왔다. 성적으로 뽑고, 스펙으로 뽑고, 경력으로 뽑았다. 대학은 취업 가능한 인재를 골라내고, 기업은 즉시 전력을 골라내고, 정부는 취업자 수를 셌다.
뽑는 모델에서 청년은 평가의 대상이고 부족한 것을 채워야 하는 존재다. 이 질문이 청년을 잃게 만든다. 강점기반심리학의 아버지 돈 클리프턴은 물었다. 사람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묻는 대신 무엇이 옳은지를 연구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나를 억제하는 힘이 아니라 나의 강점으로 가장 좋은 나를 만드는 힘이라 했다. 사람은 약점을 지적받을 때가 아니라 강점을 발견하고 인정받을 때 스스로 희망을 만들기 시작한다. 강점은 인정으로, 인정은 가능성으로, 가능성은 희망으로, 희망은 나는 할 수 있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잠재력은 뽑는 것이 아니라 피우는 것이다. 그리고 피우는 데는 토양이 필요하다. 경영자가 사람을 이해하고(Understanding), 가능성에 투자하고(Investing), 신뢰하여 권한을 줄 때(Trusting) 3E의 토양이 만들어진다.
메디치는 예술가를 고용하지 않았다…인간번영을 위한 기업모델이 600년 전 메디치 은행에 있었다
르네상스를 만든 메디치의 힘은 돈이 많았다는 데 있지 않았다. 메디치는 두 가지를 했다. 기회를 보는 사람을 직원이 아니라 파트너로 만들었고,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 공방을 열어 주었다. 하나는 은행이고, 다른 하나는 공방이다.
현장에서 기회를 보는 사람을 파트너로 만들었다.
1397년 설립된 메디치 은행은 지점을 두지 않았다. 지점마다 별개의 회사를 세웠다. 로마, 베네치아, 제네바, 브뤼헤, 런던의 거점은 본사의 직영점이 아니라 각각 별도의 파트너십이었고, 현지 책임자는 월급을 받는 직원이 아니라 자기 돈을 넣고 지분을 가진 동업자(Junior Partner)로 자본과 경영에 참여했다. 각 지점은 별도의 관리와 자본과 회계장부를 가졌다. 1455년 베네치아 지점장 알레산드로 마르텔리는 자본의 7분의 1을 댔지만 이익의 5분의 1을 가져갔다. 더 넣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만든 사람이 더 가져갔다. 본가는 브랜드와 자본과 신용과 네트워크를 공급하고 경영은 현장에 맡겼다. 현지 파트너가 시장과 거래기회를 발견했다. 중앙은 모든 기회를 볼 수 없다. 기회는 현장에 있다.
이 원리는 메디치만의 것이 아니다. 오늘의 로펌에서 뛰어난 변호사는 사건을 잘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파트너가 되지 못한다. 고객을 확보하고 새로운 사건과 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 맥킨지의 파트너는 보고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고객기업의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고 프로젝트를 만들며 최고의 전문가를 조직하는 사람이다. 없던 사업기회와 매출을 만들어오는 이런 사람을 레인메이커(Rainmaker)라고 부른다. 조선에도 같은 사람이 있었다. 조선 후기 광산 경영의 주체였던 덕대(德大)는 광산주와 계약해 노동자를 고용·관리하며 생산을 조직했다. 덕대의 본질은 곡괭이질이 아니라 어디에 광맥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능력이었다. 광맥을 발견하면 자본을 조달하고 사람을 모아 채굴을 사업으로 만들었다. 메디치의 지점장, 로펌의 파트너, 조선의 덕대를 관통하는 핵심은 하나다. 기회를 발견한 사람이 그 기회의 주인이 되고(Opportunity Ownership), 성과를 나눈다.
메디치는 예술가를 고용하지 않았다.
공방을 세워주고, 이름을 빌려주고, 결과를 나눴다. 자본이 없는 도제가 그 안에서 장인이 되고 거장이 되었다. 지점장은 자기 돈을 넣은 부자였지만 도제는 재능만 가지고 들어왔다. 오늘의 청년은 도제 쪽이다. 메디치가 도제를 거장으로 키운 방법은 뽑는 것이 아니라 피우는 것이었다. PERMA로 읽으면 공방은 강점을 발휘하는 몰입(E)의 자리였고, 스승은 관계(R)였고, 작품은 의미(M)와 성취(A)였고, 결과를 나누는 규칙은 내일에 대한 기대(P)였다. 이것이 르네상스 문명의 시대를 열었다.
휴먼 플러리싱의 메디치형 인간성장모델
600년 전 르네상스를 일으킨 것이 바로 이 모델이다. 나는 이것을 메디치형 인간성장모델이라 부르고 싶다. 청년을 뽑아 쓰는 모델이 아니라 청년의 잠재력을 피우는 모델이다. 회사는 지주회사가 되고, 개인은 창업기업이 된다. 이 모델은 사람을 직원이 아니라 창업가로 만든다. 로펌과 맥킨지가 뛰어난 전문가를 직원이 아니라 파트너로 세우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고용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고용 위에 성장과 성과와 지분을 얹자는 것이다.
모델은 하나의 출발점과 다섯 요소로 이루어진다. 출발점은 인정이다. 청년의 강점을 먼저 발견하고 인정한다.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묻는다. 첫째, 후원자다. 회사와 대학이 브랜드와 자본과 고객 접점과 AI라는 곡괭이를 공급한다. 둘째, 공방이다. 청년은 3~10명 마이크로 기업의 대표가 되어 고객을 직접 대면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팀장 대신 대표를 세운다. 셋째, 도제다. 학생 파트너에서 대표로, 대표에서 창업가로 오르는 성장 사다리다. 넷째, 스승과 동료다. 경력과 인맥과 신뢰를 가진 시니어 멘토가 곁에 서고, 공방 안 동료 사이에 신뢰가 있다. 다섯째, 성과 공유다. 생계 하한선(Base)은 회사가 지고, 성과(Share)는 사전 약정 비율로 나누며, 분사할 때 지분(Equity)을 준다.
이 여섯 요소가 3E의 토양을 만들고, 그 토양이 PERMA를 피운다. 인정이 긍정정서를, 후원자와 공방이 몰입과 의미를, 성장 사다리와 성과 공유가 성취를, 스승과 동료가 관계를 만든다.
제안 1.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기업 만들기
이 글이 제안하는 첫 번째 모델은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기업이다. 매출과 이익이 높은 기업이 아니다. 청년의 강점을 먼저 인정하고(인정), 자본과 이름과 AI라는 곡괭이를 대고(후원자), 3~10명의 마이크로 기업에서 스스로 결정하게 하고(공방), 학생 파트너에서 대표로, 대표에서 창업가로 오르는 사다리를 놓고(도제), 시니어 멘토와 동료를 곁에 세우고(스승과 동료), 생계 하한선을 지고 성과와 지분을 나누는(성과 공유) 기업이다. 이 여섯 요소가 공감·역량활성화·권한부여의 3E 토양을 만들고, 그 토양에서 긍정정서·몰입·관계·의미·성취의 PERMA가 열매를 맺는다. 그 기업의 성적표에는 매출 옆에 그 안의 청년이 얼마나 몰입하고 성장하고 내일을 기대하는가가 함께 적힌다. 세 안전장치가 있어야 이 기업은 착취가 아니라 동업이 된다. 청년이 일하고 싶은 기업은 청년을 뽑는 기업이 아니라 청년을 피우는 기업이다.
제안 2.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라 만들기
두 번째 모델은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라다. 모든 청년에게 좋은 직장을 보장하는 나라가 아니라, 내 잠재력이 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나라다. 그 나라가 할 일은 새 지출이 아니라 네 가지 방향 전환이다. 첫째, 잰다. 청년의 미래 기대와 일터 몰입을 국가통계에 넣어 청년층을 분리 공표하고, 청년 번영 비율·일터 몰입률·전일제 고용률·첫 일자리 1년 유지율을 청년 번영 대시보드로 해마다 발표한다. 둘째, 목표를 바꾼다. 청년 예산의 성과를 취업자 수에 더해 일터 안의 경험으로 평가한다. 셋째, 문을 연다. 근로계약을 유지하는 사내벤처형과 본인 선택의 분사형 두 트랙에 세 안전장치를 법정 요건으로 붙여 메디치형 기업의 법적 기반을 만든다. 넷째, 대학을 공방으로 바꾼다. 취업률 옆에 문제 발견과 시장 검증의 경험을 성과지표로 놓고, 모든 학생에게 AI와 시니어 멘토를 붙인다.
두 모델은 하나의 사슬이다. 기업이 청년을 피우고, 나라가 그것을 재고 뒷받침한다. 기업의 질문은 이 사람을 얼마에 쓸 것인가에서 이 사람의 잠재력을 어떻게 만개시킬 것인가로, 청년의 질문은 누가 나를 뽑아 줄까에서 나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누구의 성공을 도울 것인가로, 국가의 질문은 몇 명이 취업했는가에서 청년은 얼마나 번영하고 있는가로 바뀐다. 하버드가 22개국에서 본 것은 결과였다. 그 결과를 만드는 것은 기업의 손과 나라의 자다.
한국의 경제 기적은 성공했다. 기업을 번영시키는 법을 우리는 이미 안다. 다음 기적은 사람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600년 전 메디치가 도제를 거장으로 키웠듯 오늘의 기업과 대학은 청년을 피운다. 채용하려 하지 말고 만개시키라. 잠재력은 뽑는 것이 아니라 피우는 것이다.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기업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나라를 만든다.
서울대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도쿄대 경제학부 객원연구원, MIT 국제자동차프로그램(IMVP) 연구위원, 조지워싱턴대학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혁신경제분과 위원장,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이사, 신남방정책 민간자문위원을 역임하며 정부 자문 역할도 수행했다.
또한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포스코에너지 등 대기업의 자문교수 및 현대모비스·홈앤쇼핑·킨텍스 사외이사 등 산업계와 학계를 연결하는 산학연 허브형 리더로 평가받는다. 윤경ESG포럼 공동대표, 한국인도네시아경영학회 회장으로서 아세안과의 경영교육 및 교류 확대에도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사람중심 기업가정신'(2018), '이토록 신나는 혁신이라니'(2019), '플랫폼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2015) 등이 있다. 다수의 국내외 수상 경력도 보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