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럴 때마다 나는 귀를 닫은 채 “예, 예”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곤 했다. 민주화를 갈망하며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마음을 할머니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낡은 훈계처럼 들렸다.
“아직도 군대에 있었다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라요. 정신과에 입원하고 나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아요.”
폐쇄병동에 입원한 젊디젊은 군인은 면담 중 군 생활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순간 ‘나 때는 복무 기간도 더 길었고 구타와 욕설이 일상이었어. 수십 명이 다닥다닥 붙어 잤지. 요즘은 개인 침대에 에어컨도 있고, 휴대전화도 쓰고 월급도 많이 받잖아’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애써 삼켰다.
그에게도 군 복무는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전 세대가 더 힘들었다고 해서 그의 고통이 덜한 것은 아니다. 그는 생애 두 번째 군 복무를 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것은 그가 지금껏 만난 가장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그를 병동으로 돌려보낸 뒤 진료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외동으로 자란 그는 혼자만의 공간과 비교적 자유로운 선택에 익숙했다. 그런데 어느 날 원하지도 않은 군대에 들어가 낯선 사람들과 함께 먹고, 씻고, 훈련하고, 잠들어야 했다. 일과가 끝난 뒤에도 마음대로 밖에 나갈 수 없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삶의 통제권을 빼앗기는 억압과 구속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분노와 답답함이 쌓인 끝에 그는 손목을 그었고, 병원에 오게 되었다.
돌아보니 나도 그랬다. 할머니는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쌀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당시 내게 그것은 감사해야 할 기적이 아니라 사람이 당연히 누리는 삶이었다. 이제야 안다. 할머니가 내 마음을 몰랐던 만큼, 나도 할머니가 살아온 세계를 몰랐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우물에 사는 개구리인지 모른다. 우물 위로 보이는 작은 하늘을 세상의 전부라 여기고. 나 역시 할머니의 우물 밖에서, 그의 우물 밖에서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는 것을. 할머니에게 나는 “왜 우리의 절박함을 모르시나요”라고 속으로 원망했으면서, 정작 그 젊은 군인 앞에서는 “나 때는 훨씬 힘들었다”는 말을 참느라 애를 썼다. 결국 세 사람 모두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이 통과해 온 고통의 크기로 타인의 고통을 재단하려는 병, 자기 우물의 깊이가 세상에서 가장 깊다고 믿는 병 말이다. 고통에는 절대적인 눈금이 없다. 그러니,고통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각자의 고통이 곧 생애 최대치의 고통이다. 할머니에게는 전쟁이, 나에게는 거리의 최루탄이, 이 청년에게는 태어나 처음 맞닥뜨린 통제와 결핍이 그러했을 것이다. 경험의 총량이 다르다고 해서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보다 힘든 사람도 있다”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침묵을 강요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의사로서 나는 이 청년의 손목에 남은 흉터를 보며 다짐한다. 그의 우물 깊이를 함부로 재지 않기로, 그가 딛고 선 바닥에서부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기로. 어쩌면 진정한 치유란 그를 내 우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그의 우물로 내려가 그가 보는 하늘의 색을 함께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이 청년도, 자신의 우물 밖에 있던 사람들의 우물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최영훈 일산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