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적 훈계보다 언행이 더 큰 울림
무언의 교육효과 살리는 사회 되길

1966년 발간된 저서 ‘무언의 차원(The Tacit Dimension)’에서 헝가리 태생의 영국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yni, 1891~1976)가 다음과 같은 명제를 던졌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 수 있다(We can know more than we can tell).” 소위 ‘폴라니 역설(Polayni paradox)’이라는 것이다. 세계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자연은 어떻게 돌아가고 자신의 능력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상당 부분 명확한 이해를 넘어선다.
폴라니의 역설은 우리가 수많은 사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수행하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 규칙이나 절차를 말이나 논리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자기 무지(self ignorance)의 지식은 교통 체증 속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으로부터 수십 년 만에 찾은 고향 산천에 눈물짓는 것이나 오래된 친구를 만나도 어려움 없이 얼굴을 알아보는 데까지 무수한 인간 활동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많은 작업에 참여할 때 언어적 수단이나 데이터로는 적절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의 지식(tacit knowledge)에 의존한다. 기실 자신을 돌이켜 보면 오늘 한 일이나 사고 가운데 과연 몇 가지를 논리적인 추리와 데이터에 따라 행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폴야니의 혜안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인간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닌지 상상해 본다.
폴라니의 역설이 등장한 것은 자동화나 인공지능이 운위되기 훨씬 전이었지만 뒤에 그와 같은 연구와 시도에 적지 않은 장애가 되었다. 자동화나 시스템을 프로그래밍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논리와 절차 그리고 데이터에 따라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 노동, 연구, 전문성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으나 인지하고 있는 무언가에 기초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동화나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무언의 지식을 논리와 데이터로 변환해야 한다. 그러나 무언의 지식이라는 용어가 함의하는 바와 같이 그와 같은 작업이 쉬울 수가 없었다. 인공지능이 이제 인간을 집어삼킬 듯하지만 아직 멀어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폴라니 역설이 어려움보다는 오히려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영역이 예술과 교육 아닐까 싶다.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고흐, 피카소의 미술을 보면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서로 다른 감동을 얻는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도 데이터로 분석할 수 없지만 헤아리기 어려운 감동을 준다.
심지어 시작(詩作)에서는 직관적으로 이해는 가지만 분석은 쉽지 않은 모호성(ambiguity)을 이용하여 시적 감흥을 증폭시킨다. 교통신호처럼 일의(一意)적인 문장의 나열이 시적 감동을 유발할 수 없지만 다의적이고 모호한 표현이 오히려 연인과 고향,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달하곤 한다.
교육이야말로 언어적 전달과 함께 행동, 태도, 분위기와 같은 의도하지 않은 부수적인 요소들이 보이지 않게 효과를 증폭하거나 감소시키는 분야이다. 코로나의 유행으로 원격수업이 일반화되면서 수학능력이 크게 저하되었다는 연구들이 많았다. 원격수업이라 해서 말로 전달하는 교육의 내용이 대면 수업의 경우와 크게 달랐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된다. 다른 것은 아마도 원격수업에는 가르치는 이의 행동, 태도, 분위기가 녹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서로 쳐다보면서 이루어지는 교육에서는 말로 하는 내용보다 더 많은 가르침이 일어나는 것이다. 때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와 같은 교육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지 짐작해 보는 이유이다.
교육의 보이지 않는 효과가 지배하는 영역이 가정일 것이다. 자식 교육에는 부모의 언행, 분위기 등이 더 큰 역할을 한다. 자식들은 부모의 명시적인 훈계보다 평소 부모의 행동거지로부터 배우는 바가 더 많다. 교육 현장이나 가정에서의 교육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사고에서도 미디어의 뉴스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배경의 교육효과가 더 큰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한 사회가 보다 나은 미래로 진화해 나가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언행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바보다 더 큰 교육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폴라니의 역설에 비추어 보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모든 언행이 교육이다. 언행의 보이지 않는 교육을 생각하는 지도층이 이끄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