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 우리에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입력 2026-01-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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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살아있음 일깨우는 심장박동 소리
새해엔 묵은 것 버리고 새삶 그려
저마다의 생업에서 소임을 다하자

취업절벽·불경기에 몸은 고달파도
이웃과 함께할 때 내일 더 좋아져

새해 첫 해가 뜨고 빛이 번지자 홀연 백두대간이 늠름하고 광활한 자태를 드러낸다. 어느 한 군데 빠짐없이 고루 퍼지는 햇살 아래 시선은 저 먼 푸른 하늘에 두고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해본다. 눈 감으면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숲과 제주도 사려니숲과 동해의 거친 파도 속에서도 제 자리를 지키는 울릉도와 독도, 서해 끝에서 외롭게 솟아 펄펄 날리는 눈송이를 받는 격렬비열도의 풍광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신의 체현 같은 고요한 풍광들 앞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겸손함이다. 오, 내가 밟은 모든 땅이여, 그 모든 곳곳에 평화와 안녕이 깃들기를 축성한다.

새해 첫날에도 기쁨 한 줌 없다면 뭔가 잘못 된 게 분명하다.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하루, 그 생의 환희와 지복에 조응하는 마음이 없다면 죽은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이 순간 우리는 굼벵이나 하루살이 같은 미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 있음의 충만 속에서 심장 박동 소리를 듣지 않는가? 우리 안의 벅찬 기쁨은 지금이 별의 순간임을 번뜩 깨닫게 한다. 새해엔 묵은 것들을 밀쳐두고 새 삶을 설계하자. 먹고 웃으며 일하고 뜨겁게 사랑하자! 오랜 경전에서도,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라고 하지 않던가?

‘약속’은 공동체 떠받치는 출발점

로버트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를 중학교 영어시간에 처음 읽었다. 세월이 흘러도 이 아름다운 시를 잊을 수는 없다. 시인은 눈 내리는 저녁 숲가의 고요와 그 고요를 낯설어하며 제 방울을 딸랑거리는 어린 말, 그리고 잠들기 전 갈 길을 가늠하는 나그네의 외로운 심정을 드러낸다. 이 시는 고요한 시간에 음미하며 읽을 가치가 있을 테다.

“이곳이 누구의 숲인지 알 것 같다./그의 집은 마을에 있어/눈 덮이는 그의 숲을 보느라/내가 여기 멈춰선 것을 모르리라.//내 작은 말은 이상하게 여기리라./한 해 중 가장 어두운 저녁/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농가도 없는 곳에 이렇게 멈춰 선 것을.//어린 말은 목에 달린 방울을 딸랑거린다./무슨 잘못이라도 있느냐는 듯/방울소리 말고는 스쳐가는 바람소리와/풀풀 날리는 눈송이의 속삭임뿐//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그러나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잠들기 전 가야 할 먼 길이 있다./잠들기 전 가야 할 먼 길이 있다.”(로버트 프로스트,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 서서’)

시가 뭔지도 모르는 소년의 가슴을 흔든 것은 뜻밖의 고요, 그 신성과 깊이였다. 혼자 여행하는 나그네는 눈 내리는 숲속 풍광에 깃든 뜻밖의 고요를 관조하며 청각에 들어오는 소리에 집중한다. 주변의 바람 소리, 눈 내리는 소리, 말이 흔드는 방울소리를, 고요는 단박에 제압한다. 이 고요는 신의 침묵과 닮았다. 그것은 소리의 부재보다는 침묵의 충만일 테다. 나그네는 숲가에 서서 제 약속을 떠올리는데, 약속이란 사회 공동체를 떠받치는 윤리의 기초이자 시작점이다.

약속과 그 책임을 방기하는 사회는 엉망진창이 될 테다. 이 서정시의 시적 전언은 사람이 지킬 약속과 그 약속들이 환기하는 윤리의 신실함으로 오롯하다고 할 테다.

새벽 뚫고 달리는 열차의 역동성

막달 며칠 동안을 나는 병실에서 지냈다. 수술을 마치고 몸이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짧았던 병실 생활이지만 단조롭고 지루했다. 새벽 미명을 뚫고 달리는 첫 전동차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밤 근무자와 교대한 간호사는 체온과 혈압을 재고 혈액검사를 위한 피를 뽑아 갔다. 간호사는 수시로 링거 거치대에 매달린 수액과 항생제 양을 확인한다. 오전 의사 회진이 끝나면 종일 병상에서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소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환자 급식을 먹고 책을 조금 들여다보며 염증 수치와 바이털 신호들이 정상이 되기를 기다리는 게 다였다.

돌아보면 묵은해에 우리 사회는 여러 일들로 요동쳤다. 계엄이 일으킨 파동으로 사회가 들끓는 가운데 새 대통령을 뽑았다. 초대형 산불이 번져 생업 터전을 잃거나 산업 재해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았다. 청년들은 취업 절벽에 무릎을 꿇고 소상공인들은 불경기에 의기소침했다. 사기꾼들은 제 잇속을 챙기려고 남을 곤경에 내몰며 악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남의 피를 빠는 모기떼같이 극악한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 하는 반려동물을 유기하거나 패대기치고 불태우는 막된 인간에게는 살의라고 해도 좋을 분노가 치민다.

말없이 자리 지키는 이들 보듬길

사는 게 순탄치 않았건만 슬하의 어린 것들은 잘 자라 우리 품을 떠난다. 제 생업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이웃들이 있고, 게다가 사회 공동체의 윤리적 푯대로 삼을 만한 어른들이 곁에 있다는 건 미래를 낙관하는 근거가 되었다. 쇠를 모루에 놓고 망치질하는 대장장이와 조선소의 그 많은 용접공들, 벌통을 싣고 이동하는 양봉업자, 거리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환경미화원, 송년을 기념하는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마지막 악장을 연주하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자!

말없이 자리를 지키며 성심을 보이는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 일상은 얼마나 볼품이 없을까? 우리가 누리는 삶의 안녕과 안전은 알 수 없는 이웃들이 저마다 소임을 다한 덕분이다. 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자! 우리 안의 꿈과 열망을 가꾸면서 선량한 이들과 일을 도모하고 사자처럼 웃자. 오늘보다 내일이 더 좋을 것이란 기대를 품고 힘차게 새해 첫발을 내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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