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버블 붕괴ㆍ금융위기 겪으며 교훈
외형 확장보다 기술ㆍ인재 육성 내실 다지기
기업들 글로벌 AI 스타트업 지속 투자
정부도 직간접 지원 등 위기대응 나서
AI 산업 기초 기반 중장기 도약 예고

인공지능(AI) 후발주자로 치부되던 일본이 ‘조용한 역습’을 시작했다. 생성형 AI 열풍 속에서도 룰베이스에 머물며 존재감을 잃었던 일본 기업들이 최근 강력한 반등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한국보다 한발 앞서 씨를 뿌린 장기 투자가 비로소 임계점을 넘으며, 일본은 이제 추격자를 넘어 무서운 복병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산업용 로봇은 오랫동안 규칙 기반 제어를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이는 AI 기술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숙련된 인재와 현장 인력이 축적한 노하우를 안정적으로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 선택이었다. 로봇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업계에서는 로봇 대신 사람이 하면 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깔려 있는데, 이는 그만큼 유능한 인력이 잘 뒷받침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다만 모든 산업 현장이 AX(인공지능 전환)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일본 로봇 기업들 역시 AI 접목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최근 일본 내에서도 기존 자동화 기술 위에 AI를 빠르게 얹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본 기업들이 다시 속도를 낼 수 있는 배경으로 과거의 위기 대응 방식을 꼽는다. 벤처캐피털(VC)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본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 정부가 금융 시스템과 기업을 직간접적으로 떠받치며 시간을 벌어줬다”며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단기 생존보다 연구개발(R&D)과 인재 유지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고 말했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 부동산 버블 붕괴와 1990년대 후반 금융위기를 거쳤다. 이후 정부는 금융 시스템 안정에 주력했고, 기업들은 부채를 직접 떠안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급격한 파산과 대규모 구조조정을 최소화하는 방식이었다.
한 차례 위기를 겪은 일본 기업들은 외형 확장보다 본업의 기술력과 인재 육성이 장기 생존의 핵심이라는 점을 깨달았고, 이후 연구조직과 핵심 인력을 유지하며 내실을 다지는 데 힘을 쏟았다. 이 시기에 축적된 기술과 인력이 오늘날 AI·로봇 경쟁력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투자 흐름에서도 일본의 장기 전략은 뚜렷하다. 일본계 자본은 십여 년 전부터 글로벌 AI 스타트업 투자에서 꾸준히 이름을 올려왔다. 소니는 2016년 약 100억 엔 규모의 벤처펀드를 조성해 로봇과 AI 분야 14개 스타트업에 투자했고, 도요타 연구소 역시 2017년 1억 달러 규모의 AI 투자 펀드를 설립해 자율주행차와 로봇 분야 스타트업 육성에 나섰다. 단기 수익보다 기술과 인재의 성장 가능성을 중시하는 투자 기조가 특징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소프트뱅크다. 2017년 출범한 1000억 달러 규모의 비전펀드는 AI, 로봇공학, 사물인터넷(IoT) 등 신흥 기술 전반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이후에도 소프트뱅크는 비전펀드를 중심으로 글로벌 기술 기업에 대한 투자를 이어왔고, 최근에는 오픈AI와 오라클 등이 참여한 미국 AI 인프라 합작 프로젝트 ‘스타게이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AI 기술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전부터 인재와 연구개발(R&D)에 체력을 쌓아온 전략이 이제 가시화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벤처 투자 규모는 미국이나 중국에 비하면 여전히 작다. 그럼에도 일본 기업과 투자업계의 신기술 흡수 노력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앞서의 VC 업계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과 VC들은 이미 상당한 투자를 집행해왔고, 지금도 인재와 기술을 중심으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며 “지금은 뒤처진 듯 보이지만, 장기간 이어진 대규모 투자가 성과로 나타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도요타가 후지산 기슭에 조성 중인 ‘우븐 시티’ 역시 이런 흐름을 상징하는 사례다. 우븐 시티는 미래형 스마트 도시 실험 공간으로, 자율주행과 로봇, AI 기술을 실제 생활환경에서 검증하는 것이 목적이다. 내년부터 거주자 수용과 실증 테스트를 진행하는데, 이는 단기간에 만들어진 프로젝트가 아니라 약 10여 년 전부터 구상과 투자가 이어져 온 장기 계획이라는 점에서 일본식 인재·기술 투자 전략을 보여준다.

업계는 일본 AI의 진격은 단기적 속도전이 아닌 ‘축적의 반격’으로 분석한다. 비록 선두 탈환의 가시권엔 멀어 보일지라도, 인재와 연구 조직이라는 심층부에 쌓아온 기초 체력은 중장기적 파괴력을 예고하고 있다. 뒤처진 듯 보였던 일본의 선택이, 이제는 다른 방식의 경쟁력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