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환경·커리어 모두 열세…한국 AI 생태계 비상
늦은 국가과학자·해외유치, 글로벌 인재전쟁 역부족

#1. 카이스트에서 AI를 전공 중인 A씨는 요즘 연구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 취업을 고민하는 동료들은 거의 없어졌고 모두가 미국 포닥을 ‘사실상 유일한 진로’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상위권 대학 포닥만 가도 보험까지 포함해 연 1억 원 안팎의 생활비가 보장되고 이후 빅테크로 연결되는 경로가 뚜렷하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B씨는 “한국에 남아 AI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하겠다는 친구는 손에 꼽힌다”며 “이제는 미국으로 가야 미래가 열린다는 인식이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2. 미국 한 명문대에서 AI 기반 신약개발을 전공하고 있는 박사과정생 B씨는 최근 연구실 분위기가 술렁이는 경험을 했다. 같은 랩에서 먼저 박사학위를 받은 선배가 미국 메타(Meta)에 합류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다. 특히 선배가 받게 된 초봉이 연 80만 달러(약 12억 원)에 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구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뒤집혔다고 전했다.
이 두 사례는 예외가 아니라 한국 AI 인재생태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문제의 핵심은 ‘해외 처우가 좋다’는 단편적 비교가 아니라, 한국에는 처음부터 AI 생태계를 떠받칠 만큼의 인재 기반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아 있는 소수의 유망 인재들마저 해외로 이동하고 있으니 산업·연구·기초기술 모두가 동시에 공백을 맞을 수밖에 없다.
30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미국 시카고대 싱크탱크가 공개한 ‘글로벌 AI 인재 추적(Global AI Talent Tracker)’ 보고서는 이 같은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2022년 기준 상위 AI 연구자의 국적은 중국 47%, 미국 18%, 유럽 12%, 인도 5%, 영국 2%, 캐나다 2% 순이었고, 한국은 2%에 불과했다.
중국은 3년 만에 29%에서 47%로 치솟으며 글로벌 AI 최상위 연구자 지형을 사실상 장악한 반면, 한국은 2% 수준에 머문 채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하며 핵심 연구 집단 내 존재감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 현장은 더욱 절박하다. 교수들은 “학생들이 국내에 남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연구 환경·보상·커리어 안정성 어느 것 하나 글로벌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국내에서는 기초AI 연구를 장기적으로 수행할 여건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주요국은 이미 AI 인재 확보를 국가 전략의 최상단에 올려두고 있다. 미국은 전 세계 상위 2% AI 연구자의 60% 이상을 흡수한 데 이어 빅테크가 주도하는 초고액 연봉 경쟁으로 인재를 빨아들이고 있다. 메타·구글·오픈AI는 박사·포닥에게 수억~수십억 원 수준의 패키지를 제시하며 글로벌 인재 시장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중국은 국가동원 방식이다. 최근 10년간 7000명 넘는 해외 과학자와 연구자를 유치했고 박사·포닥·교수급 AI 핵심 인력을 대거 끌어들이는 ‘만인계획’을 가동했다. 유인책으로 주택 구매 보조금과 일반적인 계약 급여 등에 1년에 300만~500만 위안(약 6억1806만~10억3010만 원)을 지급하기로 약속하는 등 사실상 국가가 최상위 AI 연구자를 직접 스카우트하는 전례 없는 보상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도 뒤늦게 대책을 내놓고 있다. 정부는 올해 ‘국가과학자 제도’를 신설해 향후 5년간 매년 20명, 총 100명을 선정하고 인당 연 1억 원의 연구비를 지급하기로 했다. 또한 2030년까지 해외 연구자 2000명을 국내에 유치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글로벌과 비교하면 규모는 작지만 방향성 자체는 인재 확보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이 여전히 논의 단계 또는 초기 시범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글로벌이 ‘인재 선점전’을 벌이는 동안 한국은 제도 설계와 조율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