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으로 답하는 프로의 세계. “돈 받으면 프로다”라는 김성근 감독의 명언을 뒤집어 생각해보면(다소 의역) 프로의 가치는 몸값이 설명해 주는데요. FA(자유계약선수) 시즌이 되면 수십억 원이 오가는 대형 계약이 이루어지는 이유죠.
18일 내야수 박찬호가 4년 총액 최대 80억 원에 두산 베어스와 계약했습니다. 2014년 KIA 타이거즈 입단 이후 올해 처음으로 FA 자격을 얻은 그는 12년간 몸담은 친정팀을 떠났는데요. KIA 팬들은 아쉬움을 드러내면서도 “80억이면 가야지”라며 현실적인 이별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즘 한국프로야구에서 FA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이슈는 바로 ‘아시아쿼터제’인데요. 2026시즌부터 시행되는 아시아쿼터는 각 구단이 기존 외국인 선수 3명과 별도로 아시아쿼터 선수 1명을 추가 보유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벌써 3명의 아시아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 유니폼을 입었는데요. 팬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선택 배경으로 향했죠. 공통점은 단순했습니다. 금액이 아니라, 자신을 기용해 줄 ‘자리’를 찾았다는 건데요. 앞선 FA 시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죠.

SSG 랜더스는 일본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만 14시즌을 뛰며 66승을 올린 다케다 쇼타를 아시아쿼터로 영입했습니다. 경력만 놓고 보면 KBO에서 아시아쿼터 상한인 20만 달러(약 2억9000만 원)로는 데려올 수 없을 것 같은 이력의 투수죠. NPB(일본프로야구)에서 받던 연봉은 약 1억5000만 엔, 한국 돈으로 14억 원이 넘는 금액인데요. 단순 계산으로 몸값이 무려 10억 원 이상 줄었죠. 그럼에도 다케다는 한국 행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2015 프리미어12와 2017 WBC 일본 대표로도 활약한 베테랑 투수였던 다케다는 2023년 팔꿈치 수술 이후 소프트뱅크에서는 선발로 설 자리가 없었는데요. 방출 사유가 ‘전력에서 제외’가 아니라 ‘기회를 열어주기 위한 의미’였다는 점은 SSG의 판단을 더 굳혔죠. SSG는 8월 일본 2군 경기에 직접 스카우트를 보내 상태를 점검했고 다케다는 계약 전 자비로 한국을 찾아 SSG랜더스필드 클럽하우스·트레이닝 시설을 둘러보며 구단 환경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즉시 전력감”이라는 구단의 확신과 “팀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이 핵심이었는데요. 연봉이 아닌 기회를 택한 거죠.

한화의 아시아쿼터 선수 왕옌청도 비슷한 맥락인데요. 왕옌청은 대만 국가대표 출신 좌완 투수로,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국제 육성 계약을 맺고 일본 이스턴리그에서만 7년을 보냈습니다. 통산 20승 11패, ERA 3.62라는 준수한 성적을 가지고도 NPB 1군 무대는 단 한 번도 밟지 못했죠. 외국인 보유 제한이라는 구조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올 시즌에 22경기 10승 5패 ERA 3.26으로 활약해도 사정은 같았는데요. 대만 언론 ‘TSNA’는 이 부분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이번 한화와의 10만 달러(약 1억4600만 원) 계약은 정식 외국인 투수 연봉의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그가 좋은 성적을 낸다면 국제무대에서의 노출도가 생기고 더 큰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젊은 선수에게는 기회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죠. 물론 2군 연봉 300만 엔(약 2800만 원)에 비해 높은 수준인 것도 한몫했는데요. 한화는 팀 평균자책점 1위였지만 선발 좌완은 류현진 한 명뿐인 데다 좌완 불펜도 김범수·조동욱 외엔 두텁지 않았죠. 한화는 선발·불펜 모두에서 활용 가능성을 보고 왕옌청에게 명확한 ‘자리’를 제시한 겁니다. 일본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기회였죠.

kt 위즈가 영입한 스기모토 코우키는 더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스기모토는 일본에서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고 대학 졸업 후 일본 독립리그인 도쿠시마 인디고삭스에 입단했죠. 2023~2024년 두 시즌 동안 독립리그에서 뛰며 최고 154㎞/h의 빠른 공과 슬라이더·포크볼을 구사하는 투수로 성장했지만 프로로 향하는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습니다.
2025 시즌 독립리그에서 42경기 5승 3패 ERA 3.05를 기록하고, 규정이닝 투수 중 최소 볼넷(16개)을 기록할 정도로 안정적인 제구를 보여주자 kt가 아시아쿼터 상한 내에서 처음으로 프로 입단의 문을 열어줬는데요. 스기모토는 KBO 진출을 통해 ‘프로 데뷔’라는 생애 목표를 실현한 첫 일본 독립리그 출신 선수가 됐죠.
그는 과거 유튜브 예능프로그램 ‘불꽃야구’에서도 한국 무대에 관심을 드러낸 적이 있는데요. 스카우트는 당시 “볼끝이 좋다”고 평가했지만, 리그 스케줄 등 현실적 제약으로 합류까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쿼터가 생기자 그는 마침내 한국행이라는 선택지를 현실로 만들었는데요. 독립리그의 연봉 규모는 제한적이고 kt가 내민 12만 달러(약 1억7500만 원)는 그에게 충분히 의미 있는 조건이었죠. 그러나 그가 진짜로 붙잡은 건 금액이 아니라 ‘프로 선수로 데뷔한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이는 야구뿐 아니라 축구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는데요. 대표적인 사례가 프리미어리그(PL) 출신 제시 린가드죠. 린가드는 지난해 FC서울과 2+1년 계약을 맺으며 K리그행을 택했습니다. 그는 “유럽과 전 세계에서 제안을 받았지만 대부분 6개월, 1년 단기 계약이었다”며 “FC서울이 2+1년 장기 계약을 제안했고 12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직접 찾아와 줬다”고 설명했는데요. 단기 계약으로 리그를 떠돌며 입지 싸움을 반복하는 대신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이 명확히 설정된 팀을 선택한 거죠.
‘해버지’ 박지성도 현역시절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2012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서 7시즌을 보내며 PL 우승 4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를 맛본 그는 당시 절정의 커리어를 자랑했는데요. 그런데 그는 갑작스레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QPR)로 이적했죠. 그 이유를 박지성은 2021년 ‘UTD 팟캐스트’에서 직접 밝혔는데요. 그는 “맨유에서 마지막 시즌에 나는 어떠한 부상도 없는데 5경기 연속 결장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내게 (이제 끝났다는) 신호였다”며 “선수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팀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맨유는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박지성은 당시 31세였죠. 그는 “이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는데요. 모든 환경이 완벽했던 맨유를 떠난 이유는 결국 한 가지였습니다. 경기에 뛸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이었죠.
출신 리그도, 경력의 높낮이도, 연봉 규모도 모두 다르지만, 이들이 선택한 길은 단순합니다. “얼마를 받느냐”보다는 “내가 뛸 수 있는가”였죠. KBO의 아시아쿼터 제도는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린 건데요. 몸값은 깎아도, 기회는 포기하지 않는 것. 한국 무대가 지금 그 기회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