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행히 입원 환자의 상태나 경과가 좋다. 더불어 병동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도 신이 난다. “원장님 발소리를 들으니, 오늘은 크게 걱정할 일이 없겠는데요.” 인사를 건네는 수간호사의 얼굴이 밝다. “아니 어떻게 발소리로 그걸 파악하세요?” 내 물음에 빙긋이 웃으며 발소리에도 지문이 있다고 대답한다. 무게, 발 끌림 정도, 보폭 그리고 그림자처럼 따르는 울림으로 누군지가 가늠되고, 박자와 높낮이로 기분까지 파악할 수 있단다. 10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켰다는 그녀의 말이 덧붙으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병동에 올라가니 그동안 무심했던 발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저건 분명 베트남 청년의 소리일 거야. 뱃일을 하다 다리가 로프에 감기는 바람에 한쪽 다리가 절단된 젊은 남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먼 타국에 왔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생이 바뀌어 버린 그, 슬픔과 좌절에 풀 죽어 있을 줄 알았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이겨내며 목발을 짚고 열심히 재활훈련을 한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잔발자국. 가볍게 스치며 통통 튀는 것이, 308호 할머니의 소리다. 오랫동안 못 보던 미국 살던 손녀가 왔다고 자랑하던 할머니는 불행히도 말기 암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가족들의 함구 요청으로 그 사실을 할머니는 모르고 계신다.
중간중간 느리고 또 바쁜 걸음들 그리고 발소리. 하지만 계단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울음에 묻힌 그 소리는 먹먹하다. 며칠 전 교통사고로 아들을 먼저 보내고 살아남은 어머니의 멈춰버린 발소리다.
병원에는 수많은 발소리가 존재한다. 슬픔과 아픔 그리고 기쁨이 담긴 소리들. 오늘은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보이진 않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헤아린다.
누군가의 희로애락이 담긴, 무거운 중력에 대항해 힘들게 세상을 향해 내디디며 꾹꾹 눌러야만 만들어지는 그 소리.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멈춰야 했던 그래서 잠시 나에게 맡겨진 저 발소리가 오늘따라 무겁게 다가온다. 그리고 소중한 그 소리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비록 진료실 문을 열 땐 무겁고 힘든 저 발소리들이 이곳을 나갈 땐 더 가볍고 경쾌해지길.’
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