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 가을잠이 많아지는 과학적 이유

입력 2025-11-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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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과학칼럼니스트

계절 탓인지, 아니면 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요즘은 좀처럼 피곤이 풀리지 않는다. 이상하게 잠자는 시간이 짧은 것도 아닌데 계속 자고 싶다. 만사를 제쳐 두고 며칠 내리 푹 자고 나면, 웬만한 일은 다 식은 죽 먹기로 할 힘이 생길 것 같다.

잠은 내가 제일 자주 써먹는 현실 도피 수단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을 때뿐 아니라, 아무 의욕이 없고 머릿속이 멍할 때도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신기하게도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지만, 그 문제를 피하지 않고 버틸 힘이 생긴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실제로 잠자는 동안 뇌가 스스로를 ‘정비’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뇌에서는 수조 개의 신경세포가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는다. 이 활동은 마치 밤낮없이 돌아가는 도시처럼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고, 동시에 다양한 ‘쓰레기’를 남긴다. 대표적인 것이 알츠하이머병의 주요 원인 물질로 알려진 베타-아밀로이드 단백질이다. 깨어 있는 동안 이런 노폐물이 뇌 속에 계속 쌓이지만, 다행히 뇌는 이를 청소하는 자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2012년, 미국 로체스터대 마이켄 네더가드(Maiken Nedergaard)교수 연구팀은 뇌 안에 ‘글림프계(glymphatic system)’라 불리는 새로운 노폐물 청소 통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 시스템은 뇌척수액이 혈관 주위를 따라 뇌 깊숙이 스며들어 신경세포 사이를 통과하면서 노폐물을 씻어내는 구조다.

이어 2013년 사이언스(Science, 342(6156), 373~377, 2013)지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쥐가 깨어 있을 때보다 잠들었을 때 뇌척수액의 흐름이 60% 이상 빨라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뇌는 자는 동안 쓰레기통을 비우고 도로를 청소하듯이, 낮 동안 쌓인 노폐물을 말끔히 씻어낸다. “자는 동안에도 뇌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수면의 역할은 청소에 그치지 않는다. 잠은 기억을 정리하고 감정을 재구성하는 편집 과정이기도 하다. 낮 동안 우리는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감정적으로도 많은 일을 겪는다. 그 모든 경험이 한꺼번에 뇌 속에 정리되지 않은 채 쌓여 있으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런데 다행히도 잠이 들면 뇌는 그 정보를 다시 꺼내 분류하기 시작한다. 깊은 잠(non-REM수면) 단계에서는 하루 동안 새로 형성된 기억들이 대뇌피질로 옮겨지고,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자연스럽게 지워진다. 반면 얕은 잠(REM 수면) 단계에서는 감정과 연관된 기억이 다시 떠오르며, 감정의 강도가 완화된다. 실연이나 불안, 분노로 괴로운 날에도 푹 자고 나면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계절이 바뀌는 시기, 특히 해가 짧아지는 가을에는 유난히 피로하고 졸릴까? 2023년 독일 막스플랑크 인간인지 및 뇌과학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Human Cognitive and Brain Sciences)의 연구에 따르면, 가을과 겨울에는 봄·여름보다 평균 수면 시간이 약 30분 길어지고, 얕은 수면이 10~15% 늘어난다고 한다(Frontiers in Neuroscience, 17. Feb. 2023). 이는 계절의 광주기 즉, 낮 길이의 변화가 생체시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낮이 짧아지면 몸은 ‘밤이 길어졌다’고 인식해 멜라토닌 분비를 늘린다. 멜라토닌은 흔히 ‘수면 호르몬’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몸 전체의 생리적 속도를 늦추는 신호에 가깝다. 이는 체온을 낮추고, 심박수를 줄이며, 에너지 대사를 억제해 몸이 휴식 모드로 들어가게 만든다.

다시 말해 가을이 되면 ‘낮 시간 단축 → 멜라토닌 증가 → 체온이 낮아짐 → 대사 속도가 느려짐 → 피로감 증가 → 수면 요구 증가” 라는 자연스러운 연쇄 반응이 일어난다. 때문에 겨울로 가는 골목에서 잠이 많아졌다고 ‘게을러졌다’고 자책할 일이 아니다. 이는 단순한 나태가 아니라, 뇌가 에너지를 절약하고 회복 시간을 늘리려는 생리적 적응이다. 체온이 떨어지면 뇌의 신호 전달 속도와 대사율이 느려지지만, 대신 정보를 압축하고 정리하는 능력이 강화된다. 수면 중 기억 재정비와 감정 안정이 바로 이 과정의 결과다.

결국 가을철의 ‘늘어진 졸림’은 비생산적인 게으름이 아니라, 뇌가 스스로를 정리하고 계절에 맞는 리듬으로 조정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어두워지는 하늘과 낮아지는 온도는 뇌에게 더 긴 회복 시간을 허락하라는 신호다. 그러니 우리가 심신이 피곤하고 지칠 때 “잠이나 자자”고 말하는 것은 회피가 아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매우 타당한 선택이다.

이제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깨어 있을 때 생기지만, 그 힘을 회복시키는 건 언제나 잠이란 걸 알았으니 어서 내가 사랑하는 잠의 세계로 들어 가야겠다! 내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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