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백서는 여전히 '은행 중심' 근거로 구 보고서 인용
금융안정 vs 혁신 경쟁력, 제도 설계 논쟁 본격화
내년 국회 입법 논의서 발행 주체 쟁점 부상

한국은행이 최근 발간한 ‘스테이블코인 백서’에서 미국 트럼프 정부가 아닌 전임 바이든 정부 시절의 정책 보고서를 근거로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근 미국 정부의 입장이 정반대로 바뀐 상황에서, 한은이 여전히 구(舊) 행정부의 자료를 인용한 점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10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은은 지난달 27일 공개한 백서에서 ‘바람직한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위한 고려사항’ 가운데 첫 번째로 ‘은행권 중심 도입’을 제시했다. 한은은 "일부 정책기관, 학계 등의 논의에서는 높은 규제 수준 및 보호장치를 갖춘 부보 예금기관 등을 중심으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설명했다.
이 문단 하단의 각주에는 "미국 PWG(President’s Working Group on Financial Markets)는 2021년 11월 보고서를 통해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를 부보 예금기관으로 제한할 것을 권고했다"고 명시돼 있다. 문제는 해당 보고서가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시절 작성된 문건이라는 점이다.
현 트럼프 정부는 지난 7월 30일 새로운 PWG 보고서를 발표하며 이전 정부의 접근법을 '정책적 실수'로 규정했다. 새 보고서는 "스테이블코인을 미국을 '가상자산의 세계 수도'로 도약시키는 혁신적 산업"으로 정의하며, 비은행 금융기관에도 발행을 허용하되 주 단위 면허 취득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은행 중심 모델을 배제한 셈이다.
또 보고서는 한은이 추진 중인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했다. CBDC의 소매 사용은 민간 부문에 큰 위험을 초래하며 경제적 자유와 프라이버시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며 CBDC 발행을 금지하는 입법을 지지한다고 명시했다.
한은은 백서 발간 취지를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민간 영역에서 추진되더라도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 확보가 최우선돼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은 관계자는 "국제적 논의 흐름과 국내 법·제도 현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며, "발행 주체를 특정 정부 입장에 맞추려는 의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국내 학계에서는 한은의 입장을 '시의성이 떨어진 보수적 접근'으로 평가했다.
박성준 동국대 블록체인연구센터장은 "한은은 건전성과 안정성을 강조하지만 이런 접근은 민간 핀테크 산업의 혁신을 제약할 수 있다"며, "통화주권과 혁신은 양립할 수 있는 영역으로, 지금처럼 통제를 우선하면 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송인규 블록체인투자연구소장도 "한국은행의 태도는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며, "전 세계가 이미 스테이블코인 중심의 시장 구조로 이동하고 있는데, CBDC 중심 전략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비은행 발행을 일정 범위에서 허용해야 블록체인 기반의 새로운 자금 순환 구조가 형성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업계 관계자는 "한은이 미국의 새 보고서 발간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며, "기존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 현시점에서 유효하지 않은 보고서를 근거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를 둘러싼 논쟁은 향후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 설계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할 전망이다. 금융안정을 위해 은행 중심 발행이 불가피하다는 입장과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 자본시장 기반 모델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국회에서는 이르면 내년 상반기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입법 논의가 본격화될 예정이다. 발행 주체의 범위를 어디까지 허용할지, 그리고 금융안정과 혁신성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가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