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추석 연휴 극장가를 잠깐 되돌아보겠습니다.
통상 추석 연휴는 극장가의 '대목'으로 꼽힙니다. 남녀노소 함께 즐길 수 있는 코미디 장르가 특히 인기를 끌곤 하는데요. 최근 몇 년 사이 영화 제작 편수가 감소하고 관객 수도 정체되는 등 극장의 활력도 예전 같지 않지만,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와 코미디 영화 '보스'는 박스오피스 최상위권에 오르면서 연휴 극장가의 '공식'을 입증했죠.
그런데 연휴가 끝나니 반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들 작품을 제치고 '역주행'을 한 영화가 있었는데요. 다름 아닌 일본 애니메이션, '체인소 맨: 레제편(이하 체인소 맨)'이었죠.
최근 박스오피스 상위권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인기 시리즈만 이름을 올리는 것도 아닙니다. 일본의 인디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역시 주목을 받는 모습이고요. 관련 굿즈나 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합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오타쿠 문화'로 치부되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죠.

최근 활약이 가장 돋보인 애니메이션은 '체인소 맨'입니다. 9월 말 개봉한 작품은 전기톱 악마 '포치타'와의 계약으로 '체인소 맨'이 된 소년 '덴지'와 정체불명의 소녀 '레제'의 만남을 그리는데요. 전 세계 누계 발행 수 3000만 부를 돌파한 후지모토 다쓰키의 만화 '체인소 맨', 그중 인기 에피소드인 '레제편'을 원작으로 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이죠.
개봉 12일째를 맞이한 지난달 5일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돌파했는데요. 이는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 주연의 'F1: 더 무비'보다 빠른 기록이었습니다. 'F1: 더 무비'는 개봉 13일째에 100만 관객을 동원한 바 있습니다.
'체인소 맨'은 특히 뒷심이 좋았습니다. 입소문을 타더니 추석 연휴가 지나고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 조우진·정경호 주연의 '보스'를 제쳐 박스오피스 1위를 꿰찼죠. 3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찍었고요. 개봉 6주 차인 지난 주말에도 좌석 판매율 12.4%를 기록, 개봉 7주 차에도 실시간 예매율 1위를 기록하는 진풍경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날까지 284만 명의 누적 관객 수를 기록했습니다.
앞선 여름에는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하 '귀멸의 칼날')' 열풍이 불었습니다. 8월 개봉한 '귀멸의 칼날'은 6일 기준 누적 관객 557만 명을 동원했는데요. 올해 개봉작 중 조정석 주연의 '좀비딸'(563만 명)에 이어 국내 박스오피스 2위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역대 일본 영화 흥행 1위인 '스즈메의 문단속'(558만 명)과 불과 약 1만 명 차이라 기록 경신을 앞두고 있기도 하죠.
올해 흥행 순위 30위권 안에 이름을 올린 일본 애니메이션은 '귀멸의 칼날'을 포함해 총 4편이나 됩니다. '체인소 맨'은 8위고요.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은 23위,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은 29위에 올랐습니다. 올 한 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세가 남달랐던 해였음을 방증하는 랭킹이죠.

개봉을 앞둔 애니메이션도 있습니다. 다음 달에는 '극장판 주술회전: 시부야사변 X 사멸회유(이하 주술회전)'과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초화려! 작열하는 떡잎마을 댄서즈(이하 짱구는 못말려)'가 개봉합니다.
'주술회전'은 아쿠타미 게게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합니다. 만화는 전 세계 누적 발행 수 1억 부를 돌파한 인기 작품이죠. 고등학생 이타도리 유지가 특급주령(원령) 양면스쿠나의 손가락을 삼켜 그의 숙주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요. 강렬한 액션, 철학적인 서사가 어우러져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습니다. 참고로 '주술회전'과 '귀멸의 칼날', '체인소 맨'은 '귀주톱'이라는 애칭과 함께 최근 일본 소년만화 삼대장으로 꼽히곤 하죠.
다음 달 3일 개봉하는 '주술회전'은 최강 주술사 고죠 사토루가 봉인된 주술계 최대의 전투 '시부야사변'과 사상 최악의 주술사 카모 노리토시가 설계한 데스 게임 '사멸회유'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2023년 TV 애니메이션 2기로 공개된 '시부야사변' 파트, 내년 1월 일본에서 방송되는 3기 '사멸회유' 1~2회를 합쳐 극장판 형태로 선보이는 특별판인 만큼 '사멸회유' 초반부를 먼저 확인할 수 있어 특히 팬들의 기대가 커진 상황이죠.
그런가 하면 '짱구는 못말려' 신작도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미지의 힘이 깃든 종이로 인해 콧물을 잃고 '흑화'한 맹구를 되찾기 위해 짱구와 떡잎마을 방범대가 펼치는 뜨거운 댄스와 우정을 그리는데요. 8월 일본 개봉 당시 4일 만에 51만 관객을 돌파, 흥행 수입 6.3억 엔을 돌파하며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중 일본 오프닝 스코어(개봉 후 4일간, 8월 8일~8월 11일) 관객 동원수 기준 흥행 역대 1위를 기록한 바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2023년 94만 관객을 돌파한 '신차원! 짱구는 못말려 더 무비 초능력 대결전 ~날아라 수제김밥~', 지난해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중 관객 수 1위를 차지한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우리들의 공룡일기'까지 짱구는 못말려의 극장판이 연이어 성공한 만큼 이번 신작에 대한 기대도 높은데요. 무엇보다 떡잎마을 방법대 중 뜨거운 인기를 자랑하는 맹구를 주인공으로 하는 최초의 극장판이라 눈길을 끕니다.
일본 실사 영화도 스크린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습니다. 동명의 일본 인디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8번 출구'는 실관람객의 호평 속에 흥행 순항 중입니다. 원작 게임을 그대로 옮긴 듯한 싱크로율, 일상 공간에서 비롯되는 현실적인 공포, 관객도 함께 이상현상을 찾도록 유도하는 체험형 요소로 인기를 끌고 있죠.

개봉 편수부터 관객 동원 규모까지, 과거 비주류 문화로 통칭되던 일본 애니메이션은 현재 대중과 거리를 확실히 좁힌 모습입니다.
여기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의 확산이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 글로벌 OTT 플랫폼들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거 들여오면서 자연스레 진입 장벽이 낮아졌고 특정 세대에 국한됐던 취향이 보편적인 여가로 확장됐습니다.
어린 시절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를 보며 자란 세대의 소비도 영향을 미쳤을 텐데요. 단순한 일회성 콘텐츠를 넘어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 세대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산업 구조의 변화도 한몫했습니다. 애니메이션 IP를 활용한 굿즈, 전시, 공연, 게임 등 2차 창작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보는 콘텐츠'에서 '참여하는 콘텐츠'로 확장했고요. 팬들은 굿즈를 사고, 챌린지를 만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밈을 퍼뜨리면서 주체적인 문화 소비자를 자처했죠.
한때는 일부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일본 애니메이션. 이젠 개봉 편수부터 관객 동원 규모까지 어엿한 주류 콘텐츠로 자리 잡은 모습입니다. 올해 뜨거웠던 인기를 다음 달 개봉하는 신작들이 이어받을 수 있을지도 주목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