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어쩔수가없다’, 필연성을 버리고 얻은 것

입력 2025-10-2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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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연 미디어비평가

영화 ‘어쩔수가없다’에 대한 핵심적 비판은 주인공의 행위에 필연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만수는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만수는 당장 가족이 굶어 죽을 극빈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다. 그가 잃어야 할 것은 넓은 정원에서의 바비큐 파티, 아내의 테니스 레슨, 넷플릭스 정기구독 등 중산층 라이프의 상징들이다. 그에겐 여전히 마트에서 일할 육체적 능력과 팔 수 있는 집이 남아 있었다. 이 점에서 ‘어쩔 수 없다’는 만수의 변명은 석연치 않게 느껴진다.

박찬욱 감독은 이러한 의문에 직접 답했다. “이건 빵을 얻기 위한 전쟁도 아니잖아요. 중산층에서의 전락을 피하겠다는, 어찌 보면 아주 속물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만약 감독이 만수에게 극단적인 동기를 부여했다면 관객은 그를 구조적 희생양으로 쉽게 이해하고 동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은 합리화의 가능성을 좁히고, 만수를 ‘어쩔 수 있는 일’을 ‘어쩔 수 없는 일’로 포장하는 속물로 형상화했다.

감독의 문제의식은 오늘날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관점으로서 유효하다. 박정희 시절 형성된 ‘중산층 담론’은 성공적인 삶에 대한 이상적 이미지를 주입했고, 이는 타인과의 비교가 일상화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한층 강화되었다. 좋은 집과 세련된 인테리어, 해외여행, 럭셔리 스포츠 등 과시적 소비의 목록은 끊임없이 ‘평균’의 잣대를 높이며, 이 기준에 미달하는 삶으로의 전락 공포를 심화시킨다. 만수의 극단적인 행동은 바로 이 중산층의 속물적 공포를 적나라하게 비춘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만수의 살인 동기가 납득 불가능하도록 설정함으로써, 관객이 그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되지 않고 그의 도덕적 오류를 외부에서 냉정히 관찰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만약 이 전략이 성공했다면, 관객의 관심은 ‘만수는 왜 살인을 했는가?’라는 서사적 질문을 넘어, ‘저 말도 안 되는 살인까지 저지를 만큼, 중산층의 계급 전락 공포는 왜 이렇게 과도한가?’라는 사회 구조적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갔을 것이다. 부조리함을 전시함으로써 철학적 질문을 획득하는, 블랙 코미디의 성공적인 파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관객들의 반응은 감독의 의도와 다르게 나타났다. 만수의 행동을 비합리적으로 보이게 만든 ‘거리두기’는 연출 장치가 아니라 ‘개연성 부족’이라는 기술적 결함으로 오해되었다. 만수의 심리적 붕괴 과정이 충분한 감정적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수가 느끼는 공포가 관객의 내면을 건드려 스스로 질문을 찾아내게 하는 힘이 부족했기에, 이 ‘의도된 개연성 부재’는 비판적 사유를 촉발하기보다, 관객의 이해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여기에 더해, 영화의 저변에 노사 갈등의 정조가 스며있다는 점 또한 주제를 분산시킨 주요 요인이다. ‘해고는 살인이다’ 같은 익숙하고 강력한 구호, 회사의 비인간적 태도 등은 자연스레 노동 현장의 폭력적 구조를 상기시킨다. 감독은 노사 관계 비판이 핵심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 고전적인 프레임은 ‘중산층 개인의 속물적 욕망’이라는 섬세한 주제를 압도해버린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박찬욱 감독의 연출이 만들어내는 재미는 부정할 수 없다. 특유의 매혹적인 미장센은 시청각적 쾌감을 선사하며, 낯익은 배우들의 앙상블이 몰입도를 높인다. 무엇보다 경쟁 사회 속에서 버티려는 인간의 불안과 압박감이 관객에게 현실적인 공명을 남긴다.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손꼽히는 작품이라 하긴 어렵지만, 이 가을에 즐기기엔 괜찮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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