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하염없이 내리다가 멈춘 기억, 있나요?
숏폼 플랫폼에는 전 세계 각지의 흥미로운 영상이 즐비합니다. 그중에서도 어딘가 어설픈 한국어 더빙, 당최 어딜 향해 있는지 알 수 없는 배우들의 시선, 불륜이나 출생의 비밀 등 자극적인 소재로 시선을 붙드는 중국 숏폼 드라마는 은근히(?) 강력한 중독성을 자랑하는데요.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중국 숏폼 드라마 뜨면 보게 되는데 부끄러워서 말을 못 한다", "막장 스토리에 어이가 없는데 나도 모르게 보게 된다" 등의 호평(?)이 적지 않죠.
불과 수초 만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 짧지만 순식간에 몰입시키는 전개의 숏폼 드라마는 양산형 밈(meme)을 넘어 본격적인 콘텐츠로까지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 무대에 굵직한 이름의 연출진과 제작사, 출중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는 물론 글로벌 팬덤을 등에 업은 아이돌, 심지어 지자체까지 뛰어들면서인데요. '가볍게 보던 짧은 영상'이 드라마를 비롯한 콘텐츠 시장의 지형을 뒤바꾸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셈입니다.

'숏드'라고도 불리는 숏폼 드라마는 한 회당 짧으면 1분, 길면 5분가량의 분량입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그 자리에서 후르륵 볼 수 있을 만큼 짧아 시즌별로 50~100회로 구성되곤 하죠. 영상도 모바일 세로 화면(9:16 비율)에 최적화 돼 있습니다.
카카오벤처스는 지난해 글로벌 숏폼 드라마 시장 규모를 13조 원으로 추산했는데요. 한국 시장 규모는 6500억 원 수준으로 집계됐습니다.
숏폼 드라마의 강자는 단연 중국입니다. 아이미디어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에서만 숏폼 드라마 시장 규모가 373억9000만 위안, 우리 돈으로 약 7조125억 원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전년 대비 250% 이상 성장한 수준인데요. 2027년에는 중국 숏폼 드라마 시장 규모가 1000억 위안(약 19조4760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됐죠.
중국, 미국을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숏폼 드라마는 국내에서도 시동을 겁니다. 지난해 3월 국내 최초 숏폼 드라마 플랫폼인 탑릴스가 등장했고요. 같은 해 7월엔 스푼랩스의 비글루, 토종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 왓챠의 숏차 등이 출시되는 등 숏폼 드라마 시장 출사표가 이어졌습니다. 국내 메이저 게임사 크래프톤은 지난해 9월 스푼랩스에 1억2000억 원 규모의 지분 투자를 단행하기도 했죠.
지난해 말엔 드라마박스, 넷숏츠 등 주요 플랫폼이 한국어 자막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밖에도 KT스튜디오지니는 '숏폼 전문 스튜디오'로 역할을 재정의,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숏폼 플랫폼으로서의 도약을 노리는가 하면 티빙은 자체 제작 숏폼 콘텐츠 '티빙 숏 오리지널'을 순차적으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가 체감하는 큰 변화는 이름 석자가 굵직한 배우의 합류일 겁니다.
통상 숏폼 드라마는 신인 배우 출연 비율이 매우 높은 편입니다. 제작비 부담을 줄일 방법인 데다가 숏폼 드라마의 짧고 농축된 스토리 특성상 신인들의 과감한 연기, 개성을 추구하는 탓이죠.
그런데 최근에는 유명 배우들의 출연도 잦아지는 추세라 눈길을 끕니다.
배우 이상엽은 드라마박스의 '폭풍같은 결혼생활'을 통해 숏폼 드라마에 도전합니다. 4일 첫 공개된 '폭풍같은 결혼생활'은 세계 10대 재벌의 외동딸인 서지안(전사라 분)이 아버지의 과도한 사랑과 통제를 피해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면서 펼쳐지는 로맨스 드라마인데요. 이상엽은 정체를 감춘 서지안과 계약 결혼을 하며 점점 사랑에 빠지는 김현우 역을 맡아 열연하죠. '왕과 나', '하이에나, '밤에 피는 꽃' 등 드라마에 연출 및 조연출로 참여한 이창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귀궁', '낮에 뜨는 달' 등 판타지 드라마 제작에 두각을 나타낸 아이윌미디어는 판타지 액션물 '혼검: 헌터스'와 학원 판타지 '꿈에서 자유로' 등 숏폼 드라마 2편을 제작합니다. 각각 아이콘(iKON) 김진환, 유선호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내년에도 5편 이상의 숏폼 드라마를 제작할 계획이라죠.

숏폼 드라마에는 지자체도 뛰어들었습니다.
서울시는 주요 정책을 시민 눈높이에 맞춰 전달하기 위해 숏폼 드라마 '서울만 보면 설레'를 제작·공개하는데요. 총 22편으로 구성된 이 드라마는 소꿉친구의 성장과 사랑 이야기에 시정 메시지를 자연스레 녹여냈습니다. 정책을 홍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울이라는 도시가 삶의 배경을 넘어 정서적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상징성을 담아낼 계획이죠. 특히 '서울'과 '오월'이라는 인물 간의 대화, 사건 전개로 시민이 마주할 수 있는 일상 속 선택과 고민을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서울시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오늘(8일)부터 매일 순차적으로 공개됩니다.
이에 앞서 6월 숏폼 드라마 플랫폼 릴숏과 제작사 문프로덕션, 흰구름, 전북 전주시는 공동 제작한 숏폼 드라마 '구미호, 운명의 짝'을 공개했습니다. 릴숏에서 2억 뷰를 기록한 인기작 '페이티드 투 마이 포비든 알파(Fated to My Forbidden Alpha)'를 원작으로 인간과 초자연적 존재 간의 운명적 사랑과 갈등을 한국적인 스토리로 다뤘는데요. 작품의 상당 분량을 한옥마을과 전북대, 덕진공원 등 전주 대표 관광지에서 촬영했습니다.
이뿐일까요. 가요계에서도 숏폼 드라마를 새 무대로 삼는 흐름이 포착됐습니다.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 이수만이 설립한 A2O엔터테인먼트는 'MOS((Metaversal Origin Story)'라는 독보적인 세계관에 본격적으로 힘을 싣습니다. 그 일환으로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과 'A2O MAY 스토리(A2O MAY STORY)'라는 타이틀의 숏폼 드라마가 곧 공개될 예정인데요. '홈 스위트 홈'은 가족들이 한국 여행을 떠나고 혼자 남은 장난꾸러기 막내 스샹에게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A2O MAY 스토리'에서는 졸업 공연을 앞둔 셀러브리티 A2O MAY와 그들을 동경하는 A2O LTG(Low Teen Girls)의 이야기, 그리고 A2O MAY의 결성 과정이 그려지죠.
음악과 팀의 세계관, 팬덤 콘텐츠를 결합한 이 실험은 '짧은 드라마'가 아이돌 브랜드를 확장하는 수단도 될 수 있음을 방증하는데요. 정책 홍보부터 아이돌의 세계관까지, 숏폼 드라마는 콘텐츠가 전달되는 방식을 새롭게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숏폼 드라마의 성공을 단순히 "짧아서"로만 설명하는 건 반쪽짜리 해석입니다. 소비 습관 변화와 함께 플랫폼 경쟁 구도와 산업 구조 자체가 새롭게 짜이고 있기 때문이죠.
글로벌 앱 분석업체 센서타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숏폼 드라마 앱의 글로벌 인앱 수익은 7억 달러(약 9739억 원)를 돌파했습니다. 전년 동기(1억7800만 달러)보다 4배 가까이 급증한 수치인데요. 그중 숏폼 드라마 플랫폼 1위인 릴숏, 2위 드라마박스의 1분기 인앱구매 수익만 각각 1억3000만 달러, 1억2000만 달러입니다.
릴숏은 2022년, 드라마박스는 2023년 론칭됐는데요. 단기간에 폭발적 수익 성장을 이루며 새로운 콘텐츠 소비 트렌드로 자리잡은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기 숏폼 드라마 플랫폼들이 높은 수익을 거두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했고, 미국과 동남아, 중남미 시장에서 큰 수익과 다운로드 증가를 기록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시장조사기관 컨슈머인사이트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내 스마트폰 이용자들은 숏폼 영상을 보기 시작하면 한 번에 평균 21분을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롱폼 못지않은 체류 시간을 만들어내는 셈인데요. 짧은 시간을 강점으로 시청자들을 새로운 몰입 패턴으로 유도한 것으로 풀이되죠.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연속 시청 시간은 '10~20분 미만' 응답률(24%)이 가장 많았습니다. 10대의 경우 '1시간 이상' 비율이 26%로 제일 높았던 반면 60대 이상은 '5분 미만'이 27%로 나타났죠.
숏폼 드라마는 짧은 회차마다 기승전결을 압축해야 하기 때문에 서사의 밀도가 높고 몰입도 쉽습니다. 이에 광고·커머스 모델을 삽입하기도 안성맞춤인데요. 1분 안팎의 영상에 제품 노출(PPL)이나 인터랙티브 광고가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회차가 많아질수록 브랜드 노출 효과는 배가됩니다. 광고뿐 아니라 굿즈·커머스·팬덤 플랫폼과의 결합이 활발해지면 단순한 영상 소비를 넘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한 축으로 성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과제도 남아 있습니다. 세계적인 인기를 끈 국내 숏폼 드라마는 전무한 상황이고요. 글로벌 인앱 수익 10위권에 이름을 올린 국내 플랫폼도 없습니다. 론칭 4개월 만인 5월 서비스를 종료하며 씁쓸하게 퇴장한 국내 플랫폼인 펄스픽 사례도 현실을 보여주죠.
다만 드라마부터 영화, 웹툰, 웹소설 등 유수의 지식재산권(IP)를 보유한 K-콘텐츠의 확장 가능성이 기대 포인트인데요. 중국 플랫폼이 빠른 제작과 자극적 서사로 시장을 선점했다면, 한국은 완성도 높은 서사 구조와 IP 확장성을 무기로 세계 시장에 도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죠.
숏폼은 새 무대, 소비 방식을 찾아 나선 배우·아이돌, 팬덤 및 제작사·플랫폼까지 아우르는 보편적 콘텐츠로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향후 어떤 새로운 숏폼 드라마가 탄생해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을지 주목되는데요. 수 초 안에 시선을 붙들 이야기, 시원한 전개로 승부할 다음 숏폼 드라마는 무엇이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