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동맹 강화…‘투자→공장→생태계’ 선순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25일(현지시간) 미국에서 만나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정치·외교를 넘어 기업 주도 ‘인공지능(AI) 반도체 동맹’의 협력 강화를 예고한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날 한미 정상회담 이후 이어진 ‘한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의 하이라이트는 반도체였다. 이재용 회장과 젠슨 황 CEO,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양국 반도체 키맨이 한자리에 모였다. 특히 이 회장과 황 CEO는 불과 한 달 전 미국에서 만난 이후, 이날도 뜨겁게 포옹을 나눴다. 단순한 고대역폭메모리(HBM) 공급 논의를 넘어 차세대 기술 동맹으로 진화할 것이란 기대를 키웠다.
이 장면을 두고 반도체업계에서는 엔비디아에 대한 삼성전자의 고대역폭메모리(HBM) 납품 소식이 임박했다는 기대감이 높아지기도 했다. 엔비디아의 슈퍼컴퓨터에 최적화된 반도체 칩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제공하는 방안이 논의됐기 때문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AI 경쟁에서 양국 간 협력 가능성과 상호 보완성을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날 행사에서는 삼성전자의 텍사스주 테일러 반도체 공장에 대한 추가 투자 소식 등 양국 간 반도체 기업 협력의 구체적인 계획이 제시되지는 않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 반도체 공급망은 서로의 강점을 기반으로 한 공생 구조”라며 “앞으로 SK, 삼성 등 우리 기업이 미국 내에 패키징,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팹 등 제조 시설을 건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대통령은 “이에 따라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기지로 부상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은 “AI, 반도체, 바이오 등 첨단산업을 포함해 1500억 달러(약 210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달 31일 한미 상호관세 협상 타결 시 조성키로 한 3500억 달러 펀드와는 별도다. 이재명 대통령도 “대한민국이 미국 제조업 재건에 기여할 차례”라며 “삼성, SK 등이 미국 내 패키징·파운드리·테스트 시설을 건설해 공급망의 핵심 기지로 미국이 부상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 테일러에 최소 170억 달러를 들여 첨단 파운드리·패키징 클러스터를 구축 중이다. 최근에는 투자 규모를 370억 달러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 퍼듀 리서치파크에 HBM 첨단 패키징·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고 있으며, 미 상무부는 해당 프로젝트에 최대 4억5800만 달러 보조금 지원을 예고했다. 최태원 회장은 행사 직후 “AI 데이터센터와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은 한미 협력의 핵심 축”이라며 “미국 내 거점을 통해 글로벌 공급망 안정성 확보에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삼성과 엔비디아의 협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과거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용 GDDR 공급을 해왔고, 파운드리 부문에서도 일부 GPU 생산 경험이 있다. 삼성은 차세대 AI GPU ‘루빈(Rubin)’에 들어갈 HBM4 샘플을 엔비디아에 제공하며 반전을 노리고 있다. HBM4는 기존 대비 데이터 입출력 통로를 2배 넓혀 성능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릴 ‘게임 체인저’로 꼽힌다.
SK하이닉스 역시 차세대 HBM4와 패키징 기술 개발을 앞세워 미국 내 투자와 기술협력을 병행 중이다. 엔비디아와의 파트너십을 강화하며 ‘HBM 공급 1위’라는 위치를 확고히 한다는 전략이다.
이번 라운드테이블은 미국 정부의 투자 압박과도 맞닿아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한국이 대미 투자를 더 확대했으면 좋겠다”고 공개 발언했다. 미국은 일시적으로 보조금 지급을 ‘지분’ 형태로 전환하는 방안까지 거론하며 삼성, TSMC, 마이크론 등 해외 기업을 압박한 바 있다.
결국 삼성에 엔비디아와의 기술 동맹 강화는 투자 압박 대응과 시장 반전 카드라는 복합적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SK하이닉스는 미국 내 투자와 HBM 공급 우위 무기로 차세대 메모리 리더십을 다지는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AI 서버 수요 폭증으로 HBM·첨단 패키징의 병목을 푸는 기업이 차세대 반도체 사이클의 승자가 될 것”이라며 “한미 반도체 동맹을 통해 우리 기업들은 공급망 안정성과 기술 시너지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