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한류 금지령', 이른바 '한한령(限韓令)에 또다시 관심이 쏠렸습니다.
중국은 2016년 주한미군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에 반발, 한국 음악·드라마·영화 등 콘텐츠를 제한하는 보복성 조치인 한한령을 내렸습니다. 한국산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나는가 하면, 중국 관광객들의 한국 방문도 뚝 끊겼는데요. 특이점은 중국이 한한령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거나 언급한 적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한한령이란 건 없다'는 기조를 유지해왔죠.
그러나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끄는 K콘텐츠를 중국에서는 도통 볼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의 글로벌 히트작 '오징어 게임'이나 '더 글로리'? 중국에선 공식적으로 볼 수 없고요. 안방극장을 눈물로 적신 '폭싹 속았수다' 역시 전파를 타지 못합니다. 공식 수입되지 않은 K드라마를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도둑 시청'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죠.
K팝도 마찬가집니다. 1회 공연에 수만 명을 동원하는 인기 그룹의 월드투어 리스트에도 중국 도시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공연하면서 인근 지역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는 정도죠. 게임 역시 중국 내 게임 서비스 인허가권인 판호 발급을 제한하면서 쉽게 안방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한한령이 해제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피어오릅니다. 사실 이는 처음이 아닌데요. 5월에도 '한한령이 풀릴 전망'이라며 업계가 들썩였지만, 이내 풀이 죽은 바 있습니다. K콘텐츠 업계가 수차례 중국 당국의 규제에 가로막히면서도 '한한령 해제'를 꾸준히 고대하는 이유, 대체 뭘까요?

이번 한한령 해제 기대감은 걸그룹 케플러(Kep1er)가 제대로 쏘아 올렸습니다.
21일 가요계에 따르면 케플러는 다음 달 13일 중국 푸저우(福州)의 한 호텔에서 단독 공연을 펼칩니다.
케플러는 중국 공연 타이틀에 '팬콘(Fan Con·팬 콘서트) 투어 인 푸저우'를 달았는데요. 흔히 '팬콘'으로 부르는 팬콘서트는 팬미팅과 단독 콘서트 사이의 포맷입니다. 팬미팅이 소규모 교감에, 단독 콘서트가 크고 화려한 무대와 퍼포먼스에 초점을 맞춘다면 팬콘서트는 두 매력을 절충하는데요. 통상 단독 콘서트보단 적은 세트리스트로 구성되지만, 특별한 커버나 유닛 무대, 팬들과의 소통도 함께 진행돼 인기를 끕니다.
케플러가 '팬콘'을 택한 건 중국에서 한국 가수들의 콘서트가 사실상 금지된 상황인 만큼 대외적인 시선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다만 푸젠성(省)이 공연을 허가, 허가문에도 공연 곡명 등이 명시된 만큼 사실상 콘서트로 봐도 무방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공연 허가문에는 "공안 부서로부터 대규모 행사에 대한 안전 허가를 받아야 개최될 수 있다"는 내용도 담긴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CJ ENM의 엔터테인먼트사인 웨이크원 소속 케플러는 Mnet 오디션 프로그램 '걸스플래닛999: 소녀대전'을 통해 구성돼 2022년 데뷔한 다국적 걸그룹입니다. 한국과 미국, 중국, 일본 국적의 멤버 7명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9일 일곱 번째 미니앨범 '버블 검(BUBBLE GUM)'을 발표하고 컴백했습니다.
한국 국적의 멤버들도 포함돼 있다는 게 이번 중국 공연의 포인트인데요. 그간 종종 중국 무대에 오른 아이돌은 있었지만, 한국 국적이 아닌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솔로로 공연하거나, 다국적 걸그룹일 때는 한국 멤버를 제외한 멤버들만이 무대에 오른 경우도 있었죠. 한국 국적 아이돌은 공연이 아닌 팬미팅, 팬사인회 정도 행사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이번 공연 허가문에는 김채현을 비롯해 공연 인원이 7명이라고 명시돼 있어 한국 국적 멤버까지 전원이 무대에 오를 예정입니다.
또 래퍼 키드밀리도 이튿날인 14일 푸저우에서 공연을 열어 눈길을 끕니다.
여기에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의 방한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상황입니다. 만약 시 주석이 한국을 찾는다면 2014년 이후 11년 만의 방한이 되는데요. 중국발 훈풍이 '문화'와 '외교' 두 축에서 동시에 감지되고 있는 셈입니다.
중국의 빗장이 풀린다면 음반·굿즈 유통은 물론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공연장에서 투어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대규모 투어를 진행한 건 2015년 빅뱅이 사실상 마지막이었습니다. 당시 빅뱅은 베이징, 상하이, 다롄, 우한, 선전, 난징, 청두, 항저우, 창사 등 중국 11개 도시에서 콘서트 투어를 진행했는데요. 관객 수가 18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성황을 이룬 바 있습니다. 이후엔 팬미팅, 팬사인회, 쇼케이스처럼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행사가 간간이 열렸는데요. 최근엔 그룹 키키가 19일 상하이에서 팬미팅을 열고 현지 팬들을 만났습니다.
팬덤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단일 공연만으로도 상당한 경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의 기대감이 확산하고 있는데요. 방탄소년단(BTS)을 필두로 견고한 아티스트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하고 있는 하이브의 중국 법인 설립, 텐센트 뮤직의 SM엔터테인먼트 지분 확보 움직임도 기대를 키웁니다.

기대감은 가요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최근 중국 당국은 해외 콘텐츠 수입 확대 방침을 공개적으로 발표하면서 시선을 모았죠.
18일 중국 국가광파전시총국(광전총국)은 공식 위챗 계정을 통해 방송·시청각 콘텐츠 공급 확대와 품질 강화를 위한 종합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엔 '해외 우수 프로그램의 도입 및 방송 추진' 항목이 포함돼 있는데요. 한국 콘텐츠 제작사들이 중국 콘텐츠 시장에 구작을 판매하거나 한·중 동시 방영, 공동제작 등을 기대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한령 해제 기대감은 수년간 여러 차례 고조됐다가 다시 풀이 죽곤 했습니다. 다만 업계가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한데요. 바로 적지 않은 수익 때문이죠.
중국은 한류 콘텐츠가 가장 높은 몸값을 기록해온 시장입니다. 일례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2013~2014)는 회당 4만 달러에 중국에 판매돼 당시로선 이례적인 몸값을 입증했는데요. 이후 이 몸값은 끝을 모르고 높아졌습니다. 중국과 공동 제작한 '태양의 후예'(2016)는 회당 25만 달러에 중국에 판매됐죠. 같은 해 방송된 '달의 연인 - 보보 경심 려'는 무려 회당 4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정부 차원의 지원 움직임도 포착됩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같은 날 국무회의에서 "K팝에서 시작된 열풍이 K컬처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며 "K콘텐츠는 국력 신장의 새로운 동력"이라고 강조했는데요. 이 대통령은 "관계 부처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에 입각해 K컬처의 글로벌 확산 전략 수립과 지원, K팝 등 관련 시설 인프라 확충을 포함해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해 주길 당부한다"고도 전했죠.
이어 20일 방송된 아리랑 국제방송의 특별 프로그램 '케이팝: 더 넥스트 챕터(K-Pop:The Next Chapter)'에서 '케데헌'의 매기 강 감독, 그룹 트와이스 멤버 지효, 정연, 프로듀서 알티, 김영대 평론가 등을 만나서도 "문화 산업을 국가 핵심 산업으로 육성할 것이며, 문화 강국이라는 명칭이 단지 수사에 그치지 않겠다"며 "거대한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주변 풀밭도 잘 관리돼야 한다. 이런 (순수 예술과 비상업 분야) 영역은 시장 논리에만 맡길 수 없고, 정부가 책임지고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수년간 '해제 신호탄'으로 주목받았던 공연 등이 번번이 무산된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5월 푸저우에서 단독 콘서트를 예고했던 그룹 이펙스는 현지 사정으로 이를 연기했습니다. 당시 소속사 C9엔터테인먼트는 "현재 변경된 공연 일정과 장소를 논의 중이며 확정되는 대로 다시 공지드릴 예정"이라고 했으나, 공연은 아직 진행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중국에서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지드래곤도 5월 상하이에서 미디어 전시를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역시 돌연 무산됐습니다. 이보다 앞선 지난해 7월엔 록밴드 세이수미의 베이징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죠.
반면 월드투어를 진행 중인 블랙핑크는 중국 내 팝업스토어를 성황리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21일 YG엔터테인먼트(이하 YG엔터)에 따르면 블랙핑크의 팝업스토어는 2일 상하이를 시작으로 선전, 우한, 청두, 베이징 등 5개 도시 대형 쇼핑몰에서 열렸는데요. 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상하이 팝업은 방문객이 몰릴 것에 대비해 하루 1500명씩 사전 예약을 받았지만 현장 대기 인원이 추가로 몰리면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YG엔터 관계자는 "평일 운영 시간에도 학생을 비롯해 남녀노소 다양한 팬들이 방문 중"이라며 "예약 입장을 진행하지 않은 우한과 청두 팝업은 대기 줄이 행사장 내부를 넘어 외부까지 이어질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설명했는데요. 이들 팝업에서는 블랙핑크 응원봉, 캐릭터 키링, 휴대형 선풍기, 모자, 티셔츠 등 블랙핑크 굿즈상품과 앨범 등이 전시·판매됩니다. 일부 상품은 조기 품절돼 추가 발주와 예약 판매가 이뤄졌습니다.
이외에도 블랙핑크의 데뷔 9주년 기념일이었던 8일에는 상하이 랜드마크인 조이 시티의 옥상 대관람차 LED 전광판이 팀을 상징하는 로고와 핑크빛으로 점등되는 등 대형 이벤트도 진행됐죠. 같은 K팝 아티스트임에도 어떤 무대는 허용되고, 어떤 행사는 막히는 상반된 풍경은 중국 내 불확실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중국에선 해외 공연 허가를 지방정부가 관장합니다. 이때 중앙정부의 뚜렷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태에서 특정 공연이 화제를 모으면 돌연 취소하는 등 조처를 내리는데요. 즉 정치·외교적 상황에 따라 규제가 언제든 엄격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수차례 번복되는 중국의 입장에도 콘텐츠 업계가 이 시장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건 명백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 작품 판권만으로도, 단일 공연만으로도 '억' 소리 나는 매출을 낼 수 있는 시장이기 때문이죠. 최근에는 중국 정부가 지방의 소규모 비공식 행사에서 중앙의 대규모 상업 공연으로 허가를 점차 늘려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는 상황. 업계는 '이번만큼은 다를 수 있다'는 희망과 '언제든 다시 막힐 수 있다'는 불안 사이에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