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에 제철을 맞는 장르가 있습니다. 바로 호러(Horror)입니다.
점차 고조되는 음향, 절로 눈을 가리게 되는 실루엣, 손끝까지 전해지는 긴장감으로 더위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데요. 탄탄한 장르 마니아층이 형성되며 공포 영화도 계절과 상관없이 개봉하게 됐지만, 간담이 서늘해지는 탓에 역시 여름이면 특히 인기를 끌고 있죠. 절기상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는 '소서(小暑)'를 맞으면서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만큼 호러 영화를 찾는 이들도 늘어나는 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한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공포 영화 명가로 불리는 곳에서 게임으로 눈을 돌린 건데요. 이걸 '외도'(?)로 봐야 할까요?

공포 영화 팬이라면 영화 제작사 '블룸하우스 프로덕션(Blumhouse Productions·이하 블룸하우스)'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공포 영화엔 진저리를 치는 사람마저 이곳의 영화 한두 개는 알고 있을 텐데요.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가 대표적이죠.
'파라노말 액티비티' 시리즈는 저예산·고수익 영화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1편은 약 1만5000달러의 제작비로 1억9000만 달러 이상의 글로벌 흥행을 기록하며 역대 가장 높은 투자 대비 수익률을 달성한 공포 영화로 평가받는데요. 무엇보다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스타일을 대중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우연히 발견된 출처 불명의 영상'을 콘셉트로 삼는데요. 매끄러운 장면 전환 대신 누군가 캠코더를 들고 찍은 듯한 거친 화면, 4K와는 거리가 먼 화질로 '이거 영화가 아니라 실화인가?'라고 생각하게 하죠. 공포 영화뿐 아니라 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르에서도 주로 사용되는 연출 기법입니다.
블룸하우스는 이 시리즈의 기록적인 흥행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공포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임스 완 감독의 '인시디어스', 스콧 데릭슨 감독의 '살인 소설' 역시 저예산으로 제작해 흥행에 성공한 사례인데요. 특히 조던 필의 '겟 아웃'은 충격적인 서사와 남다른 연출, 곳곳에 담긴 풍자로 관객과 평단 모두를 잡으면서 호평받았습니다. 이 밖에도 '위자', '23 아이덴티티', '해피 데스데이' 등 공포·스릴러 작품을 연달아 선보이며 '호러 명가'로 자리 잡게 됐죠.
그런 블룸하우스가 이제는 '공포 게임 명가' 수식어도 노립니다. 블룸하우스는 2023년에 아예 '블룸하우스 게임즈'라는 이름의 게임 전문 레이블을 설립, 게임 퍼블리싱을 시작했는데요. 첫 작품부터 호평을 얻더니 지난달에는 새 게임의 티저 영상을 공개해 전 세계 게이머들의 눈길을 붙들었습니다.
새 공포게임의 이름은 '크리솔: 시어터 오브 아이돌스(Chrysol: Theater of Idols·이하 크리솔)'. 스페인 인디 게임사 버밀라 스튜디오가 개발한 1인칭 호러 액션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플레이어는 군인 '가브리엘'로 분해 저주받은 토르멘토사 섬을 탐험하며 태양 신의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데요. 섬 곳곳에 배치된 폐허와 기괴한 사건을 직접 체험하고 다양한 괴물과 맞서 싸우면서 살아남아야 하죠. 특이한 점은 플레이어의 피가 일종의 '탄약'이 된다는 점입니다. 무턱대고 총을 쏘다간 적의 공격을 받기도 전에 쓰러질 수 있다는 거죠.
'크리솔'은 정식 출시 전임에도 불구하고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달 북미 최대 게임쇼 '서머 게임 페스트'에 참가한 현지 매체들은 "액션과 심리적 공포가 명확한 조화를 이룬다"(벗 와이 도우), "(공포 1인칭 슈팅 게임(FPS)) 장르의 기존 강자들과 차별화되는 요소를 여러 가지 보여줬다. 특히 무기 디자인과 독특한 미적 감각이 두드러진다"(IGN) 등의 평가를 내놨는데요. 블룸하우스 공식 유튜브 채널에 게재된 공식 티저 영상도 12만 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기대를 받고 있죠. 올해 공개 예정입니다.
블룸하우스 게임즈가 처음으로 선보인 공포 게임 '피어 더 스포트라이트(Fear the Spotlight)'의 평가를 생각해보면 기대가 쏠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지난해 10월 발매된 이 게임은 스팀에서 '압도적으로 긍정적'(97%)을 기록했는데요.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 게임에 대해 "매우 몰입되고 섬뜩하며 뜻밖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라며 5점 만점에 5점을 줬습니다.

그렇다면 왜 블룸하우스는 공포 영화에 이어 공포 게임 시장에 뛰어든 걸까요?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뉴주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글로벌 게임시장 규모는 1877억 달러에 달합니다. 특히 잘파 세대(Z세대·알파세대)를 중심으로 '참여형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데요.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블룸하우스 측은 자사 영화의 팬들 다수가 이미 게임 사용자라는 점에 주목했고 "영화에서 해왔던 방식 그대로 게임에서도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고 밝혔습니다.
다양한 장르 중에서도 공포는 적은 제작비로도 강한 감정 반응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특히 게임은 영화보다 훨씬 높은 몰입도와 긴장감을 제공할 수 있는데요. 관객은 영화 속 공포를 '감상'하지만 플레이어는 게임 속에서 직접 행동하며 공포 한가운데 놓입니다. 블룸하우스가 추구해온 저비용·고감도 전략도 게임에서 어김없이 시행됐습니다. 블룸하우스는 타이틀당 500만 달러 미만의 예산을 목표로 삼고 있죠.
주목할 점은 블룸하우스가 이미 소유한 영화 지식재산권(IP) 기반 게임이 아니라 철저히 오리지널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영국 게임 전문 매체 게임즈인더스트리비즈에 따르면 잭 우드 블룸하우스 게임즈 사장은 "팬들은 영화 기반 게임을 기대하겠지만 우리는 먼저 오리지널에 집중하고 싶었다. 이는 제이슨 블룸 블룸하우스 최고경영자(CEO)가 영화 비즈니스를 구축한 방식과 유사하다"며 "오리지널 게임이 성공적으로 팬덤을 형성하면 영화나 TV 시리즈로 확장할 기회도 주어질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저예산, 창작자 중심의 성공 공식을 영화에 이어 게임 산업에도 적용하겠다는 포부죠.
즉 블룸하우스가 주목한 건 공포라는 장르의 확장 가능성입니다.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플랫폼을 게임으로 판단한 거죠.

블룸하우스가 게임을 통해 시도하는 건 단순히 플랫폼을 넓히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영화와 게임 모두에서 자사 정체성을 확장하고, 장르 중심의 IP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에 가까운데요. 공포라는 장르 특성상 훨씬 더 유기적으로 확장할 수 있을 듯합니다.
공포는 장르 자체가 강력한 몰입 구조를 갖고 있어서 서로 다른 매체 간 전환과 확장이 자연스럽습니다. 영화에서는 정적인 서사를 시청각 연출로 체험하게 하고,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선택과 조작을 통해 그 공포를 능동적으로 경험하게 하는데요. 만약 이때 동일한 세계관이나 설정이 기반이 된다면 두 매체는 서로를 보완하며 더 풍부한 서사를 만들 수 있죠.
대만의 공포 IP '여귀교(女鬼橋)'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대만의 유명한 괴담을 기반으로 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영화의 세계관과 괴담을 바탕으로 플레이어가 캠퍼스를 직접 탐험하며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1인칭 공포 게임이 만들어졌는데요. 영화와 게임은 각각 독립적인 서사를 갖추되, 괴담이라는 공통 설정을 공유하면서 관객과 플레이어가 각기 다른 경로로 같은 세계를 탐험하게 합니다. 하나의 IP를 다층적으로 확장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죠.
블룸하우스 역시 현재는 오리지널 게임 IP 중심의 라인업을 우선 구축하고 있지만, '파라노말 액티비티'나 '인시디어스' 등 기존 영화 IP와의 서사적 연결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업계 기대가 나옵니다. 초기부터 자사 영화와 게임을 분리한 것도 장르 중심의 세계관을 각 매체의 문법에 맞게 설계한 뒤 필요할 때 유기적으로 엮기 위한 준비 과정일 수도 있죠.
실로 블룸하우스는 인기 인디 공포게임 '프레디의 피자가게'를 영화화한 바 있고, 인터뷰를 통해서도 게임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왔습니다. 잭 우드 사장은 게임즈인더스트리비즈와의 인터뷰에서 "기존 블룸하우스 IP로 (게임화를) 하고 싶지만 서두르고 싶진 않다. 타이밍이 중요하다"며 "적절한 아이디어와 적절한 팀이 필요하다. 팬들도 우리 영화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방향으로 싶다. 언젠간 분명히 할 것"이라고 강조했죠.
최근에는 눈에 띄는 소식까지 전해졌습니다. 블룸하우스가 최근 호러 프랜차이즈 대표작인 '쏘우(SAW)' 시리즈의 일부 지분까지 확보한 건데요. '쏘우'를 최초로 연출한 제임스 완 감독이 이 시리즈의 권리를 확보했다는 것도 팬들을 설레게 하는 포인트입니다. 앞서 블룸하우스는 지난해 제임스 완의 제작사 아토믹 몬스터와 합병한 바 있습니다.
단편적인 게임 시장 진출이 아닌,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호러 유니버스' 확장의 일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공포 영화 명가'라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게임 시장까지 넘보는 이들의 움직임이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