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미의 예술과 도시] 29.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서 펼쳐진 콘클라베

입력 2025-05-1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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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아트 대표이사/백남준포럼 대표

수백년 이어온 인류지혜 서사로 응축
‘침묵 속 합의’ 이끄는 정치예술 무대

제도와 예술·상징 결합해 권력창출
선출 공간은 신성과 권위로 경외감
‘정치혼란’ 한국현실에 성찰 요구해

2025년 3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서 솟아오른 검은 연기는 전 세계의 시선을 붙잡았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Conclave), 즉 추기경들의 비공개 회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숨결이 깃든 장엄한 프레스코화 아래, 신의 대리인을 뽑는 이 엄숙한 의식은 단순한 종교적 절차를 넘어선다. 그것은 수백 년의 역사를 이어온 인류의 지혜가 응축된 정치적 드라마이자, 가장 숭고한 ‘제도적 상징’ 그 자체다.

‘열쇠로 함께 갇힌’이라는 라틴어 어원에서 비롯된 콘클라베는, 13세기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 의해 제도화된 이래 교황청 권력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핵심 기둥 역할을 해왔다. 이전 시대, 교황 공석 장기화로 인한 권력 공백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이 폐쇄형 회의 시스템은, 외부와의 단절 속에서 오롯이 신의 뜻을 구하는 집중의 시간을 보장한다.

고대 바실리카 양식의 웅장함

콘클라베가 펼쳐지는 시스티나 성당이라는 공간 자체가 강력한 메시지를 발한다. 고대 로마 바실리카 양식을 따르면서도 20m가 넘는 높은 천장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시선’을 경외하도록 설계되었다. 구약과 신약의 경계를 따라 배열된 바닥의 대리석 위에서, 추기경들은 인류 구원의 역사를 발아래 두고 투표에 임한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손길이 닿은 천장화 ‘천지창조’와 제단벽화 ‘최후의 심판’은 이 공간을 초월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창조의 순간을 담은 ‘하나님의 손가락’은 교황좌를 향하며 신성한 권위를 암묵적으로 지시하고, 장엄한 ‘최후의 심판’은 투표자들에게 그들의 선택이 곧 신의 심판과 직결될 수 있다는 강렬한 심리적 압박을 가한다.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신성과 권위가 극적으로 재현되는 무대인 것이다.

성당을 장식한 다른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 역시 심오한 의미를 내포한다. 보티첼리의 그림은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 영향력을 은유적으로 드러냈고, 페루지노의 그리스도 수난 장면은 당시 교황청의 시대적 과제였던 오스만 제국에 대한 대응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시스티나 성당은 단순한 종교 미술관이 아닌,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 권력과 교회 권위의 복잡한 공모 관계를 예술적으로 담아낸 역사적 기록물인 셈이다.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 와서도 그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는다. 2025년 공개된 영화 ‘콘클라베’는 미켈란젤로의 원화를 디지털로 생생하게 되살린 세트를 통해 시스티나 성당의 웅장함을 스크린에 옮겼다. 추기경들의 붉은 의상을 ‘최후의 심판’ 속 지옥불의 색조와 연결시킨 시도는, 그들의 막중한 책임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천장화를 ‘신의 시점’으로 담아낸 크레인 샷은 신성한 공간의 분위기를 압도적으로 전달하며, 실제 연기 분출 장면에서는 과학 기술을 활용하여 더욱 극적인 효과를 연출했다.

기술의 발전은 최근 콘클라베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2023년 시범적으로 도입된 전자 투표 시스템과 보안 강화를 위한 5G 차단 장치는 효율성과 안전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아프리카 출신 추기경들의 참여 증가는 교회의 보편성과 다양성을 확장하는 긍정적인 움직임이며, 여성 부제 참여 논의는 시대적 변화에 발맞춰 제도의 문턱을 낮추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심지어 환경을 고려한 ‘바이오 연기’나 가상현실을 이용한 ‘메타버스 회의’까지 실험되고 있다는 사실은, 콘클라베가 과거의 유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을 모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탈리아 수도 로마를 가로지르는 테베레강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바티칸 전경. 인구 900명에 면적은 0.44㎢로 우리나라 경복궁의 약 1.3배에 해당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도시국가다. 사진출처 바티칸뮤지엄 공식웹사이트
▲이탈리아 수도 로마를 가로지르는 테베레강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바티칸 전경. 인구 900명에 면적은 0.44㎢로 우리나라 경복궁의 약 1.3배에 해당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도시국가다. 사진출처 바티칸뮤지엄 공식웹사이트
철저한 폐쇄성, 강력한 개방절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클라베의 핵심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제도와 예술, 상징과 절차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고도의 권력 장치라는 점이다. 철저한 익명 투표와 연기를 통한 암호화된 결과 발표, 외부와의 완전한 단절은 신성한 선택의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한 불가피한 장치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철저한 ‘폐쇄성’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가장 강력한 ‘개방된 절차’가 된다. 침묵 속에서 진행되는 은밀한 합의 과정은, 그 결과에 대한 전 세계인의 궁금증과 기대를 증폭시킨다.

콘클라베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정치 예술이자,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집단적 상상력의 놀라운 결과물이라고 평하는 이들이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불멸의 그림들처럼, 이 제도는 수세기를 거치며 시대의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스스로를 갱신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처럼 극단적인 대립과 불신으로 얼룩진 한국 정치 현실을 되돌아볼 때, 콘클라베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상징적인 공간, 엄격한 절차,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합의의 과정은, 끊임없는 소음과 갈등으로 점철된 정치판에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닫힌 문 안에서 신중하게 이루어지는 고요한 합의가, 때로는 열린 광장에서의 끊임없는 정쟁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정교한 민주적 작동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시스티나의 검은 연기는 조용히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교황 레오14세가 착용한 가슴십자가와 성유물 진품을 증명하는 양피지 문서. 사진출처 바티칸뉴스
▲교황 레오14세가 착용한 가슴십자가와 성유물 진품을 증명하는 양피지 문서. 사진출처 바티칸뉴스
갈등 겪는 한국사회에도 시사점

결국 콘클라베가 지닌 예술적·정치적 함의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공동체의 미래상과도 맞닿아 있다. 그것은 단순히 누가 지도자가 될 것인가 하는 인물 선출의 절차를 넘어서,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진실에 다가가고, 어떻게 신뢰와 권위의 기반을 다질 것인가에 대한 집단적 물음이다. 이 과정에서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기억과 권위, 신념이 얽힌 ‘살아있는 장치’로 작용한다. 시스티나 성당처럼, 한 시대의 예술과 상징이 응축된 장소는 제도의 작동을 심화시키고, 구성원들에게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한국 사회 또한 위기의 순간마다 이러한 ‘의식의 장치’를 갈망해왔다. 광화문 광장, 국회 본회의장, 세월호 분향소, 이태원 등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과 권위를 부여받은 공간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지속적인 상징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제도의 엄정함과 예술적 상상력이 함께 작동하는 복합적 구조가 필요하다. 콘클라베가 보여주는 ‘의례로서의 정치’는,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민주주의의 피로감과 갈등을 되짚어보게 만드는 하나의 문화적 거울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리가 아니라, 더 깊은 침묵 속 합의의 미학일지도 모른다.

이상아트 대표이사·백남준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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