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내가 시집왔을 때”

입력 2025-04-22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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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장

내과 의사로서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있다면 바로 ‘내가 시집왔을 때’가 그것이다. “아이고, 내가 열여덟에 영감탱이 하나 믿고 이 외딴 시골로 시집을 와서…”로 시작되는 단골 레퍼토리가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다면 단단히 각오해야만 한다. 뒤를 이어 매운 시집살이와 무뚝뚝한 남편 그리고 가난한 살림 형편과 속 썩이는 자식 이야기까지, 긴 대하소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 한편이 애처롭고 가슴을 저미는, 마치 요즘 핫한 ‘폭싹 속았수다’의 아류작 같지만 자주 반복되다 보니 끝까지 듣기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게다가 대기 환자가 늘고, 도대체 나는 언제 진료 볼 수 있냐고 언성을 높이는 분들의 소리와 쩔쩔매는 간호사의 긴 한숨 소리까지 들리면 마치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느낌이다.

어느 날인가 70대 여자분이 진료실을 찾았다. 가슴이 아프고 불면증이 심해졌다는 증세를 호소했고 조금 더 묻던 중에 그분의 입에서 ‘내가 시집왔을 때’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뿔싸!”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어쩌랴, 이미 시작된 장편 대서사시인 걸. 다행히 대기 환자가 없어 ‘에라 모르겠다’고 들어주며 “아 그래요”, “힘드셨겠네요”라는 추임새까지 더하다 보니,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났다. 결국 진료실 문을 두 번이나 열고 들어온 간호사 덕에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그냥 두었다면 밤도 샐 기세였다.

그 일을 잊고 지낸 지 한 달쯤 지났을까, 꽤 낯이 익은 분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기억을 더듬다 보니 지난달 ‘내가 시집왔을 때’란 대서사시를 쓴 바로 그 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몇 달간 온갖 약을 먹어도 낫지 않던 병이 씻은 듯이 좋아졌어요. 그리고 이혼까지 갈 뻔한 우리 부부도 다시 잘살게 되었고.”

차마 꺼내지 못하고 묻어 두었던 말을 털어 내는 순간, 그리고 억울함과 아픔을 이해받았던 그 시간 동안 오래도록 그분의 가슴 속에 뭉쳐있던 응어리가 풀어지며 괴롭히던 병마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했다.

진료실을 나가던 환자로부터 거듭 감사하단 인사와 명의란 소리까지 듣게 되니 기분은 좋았지만, 한편으론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듣기만 하고도 아픈 이의 병이 치료되었으니 다행이지만, 앞으로 또 더 많은, 아니 더 긴 대하소설을 끊지 않고 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럴 때면 가끔은 나도 환자분께, “그런데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요”부터 시작하는 대서사시를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랬다간 병원은 텅 빈 절간이 될 뿐더러 직원들의 한 숨소리와 잔소리로 채워질 판이니. 어쩌랴, 입은 닫고 귀는 열어둘 수밖에.

그래도 요즘은 호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부모님들이 줄어들었다니 시골 의사로선 이보다 더 다행인 것은 없을 듯하다. 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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