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4년간 5000억 달러 투입
하이닉스, 한화세미텍 등 거래선 확대
현대차-포스코, 이차전지 소재 협력
“회복탄력성 강화 위한 투자 더 늘 것”

글로벌 컨설팅 업체 알릭스파트너스는 2020년 코로나19 당시 ‘단 7개월 만에 일어난 7년 치의 변화’라는 부제의 보고서에서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주목했다. 글로벌 생산기지의 셧다운을 경험한 기업들이 향후 사업을 계획할 때 효율성보다는 회복탄력성을 더욱 중요한 요소로 여길 것이라는 분석이었다. 회복탄력성은 경제시스템이 외부 충격에 직면했을 때 신속하게 이전 상태로 회복하거나 새로운 균형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보고서는 세계적 불황이 공급망의 지역화 및 관세 인상 추세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같은 전망은 5년이 지난 현재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기업들은 보호무역 심화로 글로벌 공급망의 취약성이 부각하자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23일 완성차 업계에 따르면 미국의 신차 재고 일수는 3월 초 91일에서 이달 중순 70일로 급감했다. 중고차 재고는 43일에서 39일로 줄었다. 관세 영향에 더해 자동차 원자재 수급 불균형이 벌어지며 차 값이 더 오를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미중 무역갈등 속에 중국 의존도가 높은 희토류, 배터리 소재가 자동차 공급망의 새로운 위험요소로 꼽힌다.
업계는 3년 전 ‘차량용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 재연을 우려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손톱만 한 크기의 칩 하나가 없어서 세계 주요 완성차 업체들의 생산라인이 중단된 바 있다. 당시 미국 시장의 딜러 재고 일수는 60일에서 24일로 축소됐다. 미국의 평균 신차 가격은 4만 달러에서 5만 달러로 25% 상승했고 일시적으로 중고차 가격이 신차 가격을 넘어서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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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벌어진 ‘와이어링 하네스(전선뭉치) 공급 중단 사태’도 기업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조달하던 비핵심 부품이 부족해지면서 현대자동차도 일주일간의 생산중단을 경험했다. 2019년에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반도체 3대 핵심소재(불화수소·포토레지스트·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수출을 금지하면서 국내 기업들이 불안에 떨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시절에는 4대 핵심 품목(반도체·배터리·희토류·바이오의약품)의 공급망을 100일간 집중 조사했다. 그 결과 공급망 재편 정책에 따라 기업들의 미국 내 생산 확대와 현지화 요구가 증가했다.
기업들은 공급망 구축에서 원가절감과 효율성 외에도 공급지역 다변화를 통한 회복탄력성 확보가 중요함을 깨달았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을 이끄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4년간 5000억 달러(약 730조1500억 원)를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세 정책 위협에 대응해 아시아 중심의 공급망을 미국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주도하는 SK하이닉스는 핵심장비인 열압착 본딩 장비(TC본더)의 공급망 다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동안 한미반도체에서만 받던 이 장비를 한화세미텍을 비롯해 싱가포르 ASMPT 등으로 거래선을 넓히고 있다.
포스코그룹과 포괄적 사업협력을 맺은 현대자동차그룹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증대하는 가운데 세계적으로 확보 경쟁이 치열한 리튬, 음극재 등 이차전지 소재 핵심 소재의 안정적이고 다변화된 공급망 확보 방안을 모색할 방침”이라고 했다.
기업들의 이런 변화는 단순한 공급망 재편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도 평가된다. 과거 저비용 고효율만을 추구하던 공급망 전략이 글로벌 리스크 시대에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경쟁력은 원가절감이 아니라 위기에 대한 대응 능력, 즉 회복탄력성에서 갈릴 것”이라고 분석한다. 특히 보호무역주의 기반의 탈세계화 현상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으로 더 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알릭스파트너스는 “공급업체의 취약성은 곧 조직 취약성으로 연결된다”며 “철저한 공급업체 평가와 회복탄력성 강화를 위한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