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푸틴의 각본, 서방의 자아도취

입력 2022-12-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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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영 국제경제부 차장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때만 해도 전쟁이 해를 넘길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특별군사작전’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다”고 시인했다. 러시아 내부에서 일주일이면 끝날 거라고 판단했던 전쟁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으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파괴할 능력을 갖춘 유일한 군대’라고 평가받던 러시아의 현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가 죽거나 다친 러시아 병사가 10만 명을 넘었다. 파괴되고 버려진 러시아 탱크와 장갑차 수는 동유럽 국가 병력 규모와 맞먹는다. 반년이 넘도록 점령한 지역은 ‘우리 땅’이라고 외쳐 뺏어간 네 곳이 전부다.

뭐로 보나 사실상 러시아가 패배한 전투다.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을 일으켜 국가를 궁지에 빠트린 푸틴의 실패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최고통수권자인 푸틴에게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나와야 정상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상하게 조용하다. 여느 독재 정권이 그렇듯, 비판적인 목소리를 틀어막아서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인들은 정보기관과 국영방송이 합작해 만든 허구의 세상에 빠져 있다. 비영리 기구 디도시크리츠(DDoSecrets)는 러시아 최대 국영 미디어 기업에서 유출된 750기가바이트(GB) 분량의 문건을 온라인에 공개했다. 여기에는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후신 기관이 ‘선별해’ 보낸 영상들, 이를 조작해 언론이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낸 과정이 담겨 있다. 이들이 창조한 현실에서는 우크라이나가 혼란에 빠졌고, 서방 동맹 간 균열이 심화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승리가 다가오고 있다. 푸틴이 기획하고 ‘협력자’ 언론이 제작한 가상현실에서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엉뚱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유의 세계 기준에서 혀를 찰 일이지만, 러시아 거짓 조작의 칼날은 이미 민주사회 깊숙이 파고들었다. 소련 붕괴 이후 서방을 넘볼 수 없던 푸틴은 새로운 각본을 짰다. 거짓 선동을 통해 분열을 조장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 바로 ‘차세대 전쟁작전(RNGW: Russia new-generation warfare)’이다.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 합동참모본부장은 “전쟁의 규칙이 변하고 있다”며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군사력 이외 수단이 늘고 있고, 효과는 무기를 능가한다”고 말했다.

푸틴의 시나리오는 사람들이 모든 내용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특히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믿음을 흔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러시아 TV 제작자로 일했던 피터 포메란츠세프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환경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설명했다.

서방의 정치·경제 난맥상도 러시아 작전을 거들었다. 러시아는 시장경제의 곪은 상처,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를 파고들어 균열을 부채질했다. 서방의 자아도취와 낙관적 편향도 독이 됐다.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자만감, 러시아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것이다. 허버트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조지 W 부시에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들이 이런 무사안일에 젖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는 사이 자신감이 붙은 러시아는 2004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2016년 미국 대선, 2017년 프랑스 대선, 2020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인 브렉시트 과정 등에 개입하며 민주주의를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데이비드 코헨 전 미국 중앙정보국(CIA) 부국장은 “러시아는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여러 국가에 개입했다”며 “우리가 꼭 해야 했지만 하지 않았던 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안전할까. 거짓 선동과 갈등 조장이 난무하고 극단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된 지 오래다.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누군가가 각본을 짠 게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0jun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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