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고령화로 활기 잃은 도심 제조업…시민 참여 교육으로 장인 명맥 이을까

입력 2020-11-26 17:44 수정 2020-11-26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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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장인에게 직접 교육받는 '을지로 중개소 - 로컬 코스'
○○은대학연구소 "기술 전수 어떻게 할지 고민 이어갈 것"

▲25일 오후에 이뤄진 '을지로 중개소 로컬코스' 목형 교육 과정. 참가자들은 예정된 교육 시간을 훌쩍 넘겨 저녁 늦게까지 목형 장인의 말을 경청했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25일 오후에 이뤄진 '을지로 중개소 로컬코스' 목형 교육 과정. 참가자들은 예정된 교육 시간을 훌쩍 넘겨 저녁 늦게까지 목형 장인의 말을 경청했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우와!", "진짜로 녹는다!" 11년 경력의 아크릴 장인이 불을 붙이자 교육을 듣는 참가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나왔다. 놀람의 목소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800℃의 펄펄 끓는 쇳물이 모래 안에서 제 모양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서도, 43년째 을지로 골목을 지키고 있는 목형 장인의 인생사 앞에서도 탄성은 계속 터져 나왔다.

이들의 만남은 침체된 도심 제조업을 살리고 을지로형 도제교육의 방식을 모색하는 '을지로 중개소'를 통해 이뤄졌다. 을지로 중개소는 서울시가 지원하는 지역 문제 해결 시민 실험실 사업으로, '○○은대학연구소'가 주축이 돼 진행하고 있다. '○○은대학연구소'는 23일부터 27일까지 '을지로 중개소 - 로컬 코스'라는 프로젝트를 열고, 디자인부터 목형 제작, 주물, 아크릴, 시보리(금속 가공)까지 조명 하나가 제작되는 과정을 시민들이 직접 장인에게 배울 수 있도록 했다. 교육 참가자는 을지로가 낯선 일반 시민부터 전문 디자이너까지 다양한 사람으로 구성됐다.

▲주안 아크릴 박상국 사장이 아크릴 압출방식과 케스팅 방식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크릴에 직접 불을 피우고 있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주안 아크릴 박상국 사장이 아크릴 압출방식과 케스팅 방식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크릴에 직접 불을 피우고 있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기자가 방문한 25일에는 조명의 소재가 되는 아크릴과 목형, 주물 교육이 이뤄지는 날이었다. 아크릴은 항공기나 자동차 유리, 건축 재료, 조명 등 다양하게 활용되는 소재다. 아크릴 교육은 11년째 아크릴을 제작하고 있는 주안아크릴의 박상국 사장이 진행했다. 박상국 사장은 10년 동안 다른 아크릴 업체에서 일하다가 1년 전 자신의 업체를 차려 독립한 아크릴 장인이다.

박상국 사장은 일반 시민의 눈높이에도 맞출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쉽게 아크릴에 관해 설명했다. 익숙하지 않을 수 있는 아크릴에 관한 용어가 담긴 프린트물을 나눠주고, 빠우(재료를 연마해 광택을 내는 기계)와 경면기(다이아몬드 날이 회전하면서 재료를 세밀하게 다듬는 연삭 기계) 등 다양한 기계를 소개하며, 직접 작동법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날 교육에 참여한 김은영 디자이너는 "공간디자이너로 일하며 사이니지 등 여러 곳에 아크릴을 많이 활용하는데 굉장히 실무적으로 유용한 교육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안전을 위해 주물 교육은 화상으로 이뤄졌다. 몇몇 참가자들은 현장에 직접 가지 못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안전을 위해 주물 교육은 화상으로 이뤄졌다. 몇몇 참가자들은 현장에 직접 가지 못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아크릴 교육 다음에는 주물 교육이 이뤄졌다. 을지로에서 모래 주조의 베테랑으로 손꼽히는 성진주물 안창식 장인이 일일 선생님이 됐다. 모래 주조란 나무나 석고 등의 딱딱한 재료로 만든 틀을 모래에 묻고 다시 떼어낸 다음 그 빈자리에 쇳물을 녹여 붓는 금속 공예 기법이다. 안전을 위해 주물 교육은 화상으로 이뤄졌다. 화상으로 주물 제작 과정을 보여준 다음, 교육 참가자들이 질문하는 형식으로 강의가 이뤄졌다.

안창식 사장은 직접 카메라 앞에서 모래로 틀을 만든 다음, 800℃가 넘는 쇳물을 틀에 부어 굳는 과정을 선보였다. 참가자들이 신기해하자 안창식 사장은 활짝 웃으며 "신기하죠? 나도 처음 배울 때는 어떻게 저렇게 나오지 하면서 신기했다"고 설명했다. 교육 내내 그가 가장 자주 했던 말은 "모래 주물로는 안되는 게 없어"였다. "철 외에 다른 금속도 다 된다. 모래 주물로는 안되는 게 없다. 아무거나 다 된다. 에밀레종 크기도 여러 사람이 매달리면 다 된다." 주물로는 안되는 게 없다는 말에 장인으로서 그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성진주물 안창식 사장은 "아무거나 다 된다는 말에 자부심이 느껴진다"는 기자의 말에 직접 자신이 만들 주물을 보여줬다. 사진은 그의 손에서 탄생한 금속 공예. (사진제공=OO은대학연구소)
▲성진주물 안창식 사장은 "아무거나 다 된다는 말에 자부심이 느껴진다"는 기자의 말에 직접 자신이 만들 주물을 보여줬다. 사진은 그의 손에서 탄생한 금속 공예. (사진제공=OO은대학연구소)

이날 마지막 교육은 43년 동안 을지로 골목을 지킨 대우목형의 장종일 사장이 진행했다. 장종일 사장은 "목형은 하루아침에 배우기 어려워 설명을 하나하나 해도 의미없다"면서도 교육 참가자들에게 열과 성의를 다해 설명했다. 대패질과 톱질을 직접 선보이기도 했고, 43년의 세월을 함께 지켜온 오래된 기계와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70년 된 연장 도구를 소개하기도 했다. 계획된 교육은 오후 6시까지였지만, 참가자들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오후 7시까지 장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우목형 기계 위에 놓여진 장종일 사장의 연장. 사진 속 기계는 73년도에 만들어졌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대우목형 기계 위에 놓여진 장종일 사장의 연장. 사진 속 기계는 73년도에 만들어졌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한때 인공위성까지 만들었던 세계 유일의 제조업 클러스터 을지로는 고령화와 재개발로 예전의 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기술을 배우려는 이가 없어 장인의 명맥이 끊기고 있는 데다가 재개발로 사라지는 업체가 생기면서 다양한 기술자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태계가 끊기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을지로 소상공인 전반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지고 있다.

실제로 장종일 사장은 교육 기간 내 기술 이전이 이뤄지지 않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목재는 제도부터 나무 소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도제식이라서 일을 배우는 데 오래 걸린다. 처음 배워 기술자가 되기까지 3년이 걸린다. 일을 배우겠다며 대학생들 3명이 찾아왔었는데 힘들어서 그런지 모두 1달도 못 버티더라. 안타까운 일이다."

▲25일 금속 공장이 몰려있는 을지로 골목에 '재개발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과 포스터가 걸려있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25일 금속 공장이 몰려있는 을지로 골목에 '재개발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과 포스터가 걸려있다. (안유리 수습기자 inglass@)

'OO은대학연구소'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다음 세대로 기술 교육과 전승이 가능하도록 하는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OO은대학연구소 김태형 팀장은 "우리는 학습과 교육으로 지역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기술 전수에 대한 고민을 담고, 새로운 '교육안'을 제안하려고 한다. 이를 시작으로 을지로에서 기술 전수가 어떻게 이뤄져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장의 가시적인 성과는 없더라도 일종의 씨앗 뿌리기인 셈이다.

이번 교육에 참여한 몇몇 참가자들은 스스로 그 씨앗을 발견한 듯하다. 김은영 디자이너는 "장인의 소명 의식과 자부심이 인상적이었다"며 "제작 과정 전반을 지켜보면서 여러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교육에 참여한 조민주 디자이너는 "을지로 일대가 재개발 되면서 아크릴 등 제가 다니던 업체가 있던 골목이 통째로 사라져 그동안 답답함을 느꼈다. 오늘 교육을 들으며 그 답답함이 어느 정도 해소된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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