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한국 재벌 3세 시대, 과거와 현재의 굴레

입력 2020-10-2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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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한국 경제의 별이 스러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가이자 혁신의 아이콘이었던 이건희 삼성 회장 타계의 울림이 크다. 찬사와 비판이 엇갈리지만, 끊임없는 ‘위기경영’으로 혁신을 거듭한 그의 리더십은 3류 삼성을 글로벌 1등으로 키웠다. 한국 경제를 선진국 반열에 올린 기업가정신의 상징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총수를 승계한다. 이병철 창업주, 이건희 회장에 이은 3세 경영이다. 앞서 현대자동차그룹도 정주영 창업주, 정몽구 명예회장을 잇는 정의선 회장 체제를 공식화했다. 한국 기업사가 3세 시대로 쓰이고 있다.

한국 재벌의 영어 표기는 ‘chaebol’이다. 복합기업의 일반명사 ‘conglomerate’와 달리 지칭하는 데서 보듯 우리 대기업 특유의 지배구조와 선단식(船團式) 경영이 강조된다. 동일한 자본계통 아래 가족이 소유·지배하는 기업집단이라는 게 대체적인 정의다. 하지만 이런 지배구조의 기업집단은 다른 나라에도 흔하다.

일본의 ‘자이바쓰’(財閥)에서 유래한다. 19세기 말 메이지유신 이후 부국강병과 산업융성 정책을 기회로 정치권력에 밀착해 거대 기업을 일으킨 경제집단이다. 미쓰비시와 야스다, 미쓰이, 스미토모 등 4대 재벌이 대표적인데, 혈연 중심의 가족(가문)이 독점 지배하는 다각화된 산업경영체였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후 맥아더 군정에 의해 해체됐다. 전쟁자금과 군수물자를 공급한 책임을 묻고, 경제력 분산으로 군국주의 부활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1949년 중국 공산정권 수립과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흐지부지된다. 재벌계 기업들의 재통합이 이뤄지고 ‘게이레쓰’(系列)로 되살아나 지금도 막강한 경제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재벌의 태생과 성장도 비슷하다. 1945년 해방 이후 적산(敵産)재산 불하, 수입권 배정, 은행 융자 등의 혜택으로 부를 키웠다. 1960년대 경제개발은 수입대체산업 육성과 수출 확대, 중화학공업 진흥에 초점이 맞춰졌고, 차관으로 도입한 외자 배분 및 금융·세제 지원 등의 수혜가 집중됐다. 이후 몇 차례의 경제위기에서 구조조정도 재벌을 축으로 이뤄져 경제력 집중, 시장 독과점이 심화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재벌은 모든 악의 근원인 ‘죄벌’(罪閥)로 타도 대상이 됐다.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선동적 정치구호는 재벌의 존재를 부정한다. 가족 소유와 문어발 사업구조, 소수 지분의 경영권 장악, 근로자와 협력업체 착취, 편법 상속과 불공정한 승자독식이 극심한 양극화의 주범이라고 한다.

재벌의 과오도 작지 않다. 그러나 그것만 부각시켜 오늘날 한국 경제의 성취를 설명할 수 없다. 삼성과 LG가 전자왕국 일본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또 삼성과 SK가 세계 반도체시장을 지배하며, 현대차가 글로벌 톱5에 올라선 과정은 무엇이었나? 수십 년 전 설탕과 치약, 옷감, 싸구려 깡통차를 만들던 기업들이었다. 재벌의 도전적 기업가정신이 성장동력이었다. 선단식 경영은 돈과 기술, 정보, 인력 등 모든 기반이 척박한 여건에서 실패 리스크를 낮추고 경영자원의 공유 시너지를 높였다. 총수에게 집중된 지배력이 신규 사업과 기술개발에 대한 모험적이고 지속적인 투자를 이끌었다. 재벌은 이 나라의 열악한 기업환경을 극복하고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진화한 조직이다.

경제를 민주화한다며 재벌개혁의 소리를 높인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재벌이 너무 큰 것이 개혁의 이유다. 지향점은 강력한 국가통제로 재벌을 거세(去勢)하는 데 있다. 정부·여당이 공정경제로 포장해 밀어붙이는 ‘기업규제 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제·개정안), 또 삼성전자의 지배구조를 파괴하는 보험업법 개정안 모두 그렇다.

이재용과 정의선의 굴레다. 이재용 부회장은 경영권 불법 승계 재판이 발등의 불이지만, 삼성물산과 생명, 전자로 이어진 출자로 전자의 경영권을 행사하는 지배구조 개편이 최대 난제(難題)다. 정의선 회장도 현대차와 기아차, 모비스, 글로비스, 제철 등이 복잡하게 얽힌 순환출자구조 해소가 다급하다. 금산분리, 출자총액제한, 순환출자금지 등 다른 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족쇄에 갇혔기 때문이다.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야 하고, 해외 투기자본의 경영권 위협에 직면해 투자자원과 경영역량의 심대한 훼손이 불가피하다.

더 나은 기업성과와 경영실적을 내는 것이 지배구조의 최선이다. 국가권력이 제멋대로 잣대와 편향된 이념으로 재벌의 지배구조를 강제한다. 키가 너무 크니 머리나 다리를 잘라 상대를 죽이고 말겠다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와 다름없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짓이다. kunny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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