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빈둥거림보다 더 바쁜 삶은 없다

입력 2020-08-2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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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최근 열탕 같은 폭염 속에서 이사를 했다. 이삿짐을 싸는데 짐이 엄청났다. 5톤 트럭 다섯 대 분량의 책이 쏟아져 나왔다. 끝없이 나오는 저 책들은 내가 활자 중독자라는 생생한 물증이다! 책을 파먹고 산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만, 이것들이 내 상전이고, 내 온몸에 빨대 꽂고 흡혈하는 마귀 노릇을 했구나, 하는 탄식이 나왔다. ‘이 지옥을 끌어안고 살았구나!’하는 각성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났다. 언젠가는 이것도 다 버리자. 이삿짐센터에서 나온 건장한 남자 열 명이 달라붙어 아침 8시에 시작한 이사는 밤 10시가 넘어서야 겨우 마쳤다. 보지 않는 책들을 솎아내고, 한동안 쓰지 않은 세간은 폐기했다. 안성을 떠나 새로 둥지를 튼 곳은 파주 헤이리 예술인 마을이다. 헤이리 새 집필실로 책을 옮기고, 이곳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책을 읽고 쓸 작정이다.

이사를 하면서 안성 금광농협에 들러 농협조합원 탈퇴서를 적어 제출하는데 만감이 교차했다. 금광면사무소에 내준 농지원부를 정리하고 영농후계자가 되려는 원대한 꿈도 접었다. 서울 살림을 작파하고 시골로 내려간 것은 2000년 여름이었다. 청년의 기개로 시작한 사업도, 결혼생활도 파국에 이르러 유배지로 쫓기듯 황급하게 이루어진 이사였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처지도 아니었던 그때 짓누르는 압박감 속에서 다시 한 번 살아보자고, 가느다란 희망 한 줄기라도 붙잡고 살아보자고 선택한 게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었다. 시골로 터전을 옮기면서 생계 수단을 살뜰하게 챙긴 것은 아니다. 저수지가 보이는 텃밭에 트럭 백여 대 분량의 마사토를 쏟아 부어 근근이 조성한 택지에 철근경량 구조의 시골주택을 짓고, 천여 평의 밭에 특용작물이라도 재배할 요량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서울에 혼자 적적하게 계신 어머니를 안성으로 모셔와 함께 살았다. 다 자란 아이들은 외지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고적한 시골 생활의 외로움에 질려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를 읽기 시작했다. “도는 텅 비어 있되 아무리 써도 궁함이 없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만물의 근원이다.” 노자의 언어는 함축적인 시고, 신생의 기쁨을 담은 계몽의 철학이었다. 왕필이 해석한 ‘도덕경’ 한 줄을 읽은 아침에는 밥을 먹지 않아도 종일 배부른 듯했다. ‘텅 빈 충만’에 대해 궁구할 때 뼛속까지 파고드는 외로움도 떨쳐냈다. 해질 무렵엔 바깥에 의자를 내놓고 청산과 푸른 이내에 잠긴 물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곤 했다. 날이 밝으면 배낭에 생수와 오이 한 개를 넣은 채 서운산 칠현산 같은 해발 4, 5백 미터 되는 산 능선을 따라 걷고, 틈이 날 때마다 칠장사, 청룡사, 석남사 같은 사찰을 찾았다. 산 능선을 걷는 걸 쉬는 날엔 안성시립도서관을 찾아 고전 문헌을 찾아 들여다보다가 돌아왔다.

비 오는 날엔 넓은 토란 잎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었다. 게으름을 삶에 대한 태만으로 낙인찍는 세태에 동조하는 동안 나는 낮잠을 혐오했다. 하지만 시골에서의 낮잠은 얼마나 관능적이었던가! 프랑스 시인 조제-마리아 드 에레디아는 그 노곤한 몸에 쏟아지는 낮잠의 달콤함에 대해 이렇게 쓴다. “바로 그때 내 손가락은 엷고 섬세하게 짜인 그물의/황금빛 그물코 속에서 한 올 한 올 빛 오라기를 붙잡는다/평화로운 사냥꾼인 나는 이제 꿈을 잡을 덫을 놓는다”. 닷새마다 열리는 안성 장엘 나가 돌아다니는 취미도 생겼다. 일죽이나 삼죽 같은 곳에서 나온 할머니들과 서리태나 호박, 옥수수, 가지 따위의 조촐한 텃밭 농산물을 흥정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안성 장날에 축산 시장을 들러 강아지들이나 볏이 붉고 큰 당당한 수탉들을 쪼그리고 앉아 살펴보고, 나무시장에서는 유실수와 배롱나무와 모란 몇 주씩을 사다가 마당과 텃밭에 심고 관상(觀賞)하는 보람을 누렸다. 나무를 심은 날 저녁은 김치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 칼국수를 먹었는데, 그런 날은 잠도 달았다.

안성에 온 초기에는 찾아갈 사람도, 집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원시 인류가 아니었음으로 사냥이나 채집 활동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저 빈둥거리다가 끼니때가 되면 밥을 끓이고 보냈다. 도시에서 그렇게 무위도식을 했다면 단박에 회의감과 공허감이 밀려왔을 테지만 신기하게도 시골에서는 빈둥거림에 대한 죄책감이나 거리낌이 없었다. 저 도시에서 속도와 성과를 재촉하는 삶에 내몰린 나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내 안에 도사린 빈둥거림을 몰아내고 죽을 둥 살 둥 머리를 굴리며 허둥대며 사는 게 좋은 삶인 줄 알았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내 손에 쥐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공허함이라니!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너구리와 고라니가 수시로 출몰하는 시골에 내려와 텃밭 1천 평을 일구며 영농후계자가 되려던 꿈은 발화되지 않는 젖은 성냥처럼 이 생에서는 영영 글러버렸다. 사실을 말하자면 농업 노동의 순결함으로 내 안에서 들끓는 수성(獸性)의 숨통을 끊고 고요 속에 숨어 살고 싶었다. 어쨌든 시골로 내려와 정착한 첫 해 돈 없고 일도 없어 생계가 막막했다. 한 영농인의 조언을 듣고 금광농협에 가서 영농자금을 대출받아 노각나무와 용솔 묘목을 수천 그루 사다가 이식했다. 그해 때마침 심한 가뭄이 닥쳐 저수지 물이 마르고, 묘목들은 빨갛게 말라 죽었다. 그 뒤로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 영농 경영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 시련 속에서도 나를 위로한 건 시골에 와서 새로 사귄 벗들이다. 선량하고 충직한 벗들을 만나면서 고갈되었던 기쁨을 회복하고 더욱 충만해질 수 있었다.

‘도덕경’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안성에 정착한 초기, 농사에 실패한 뒤 나는 ‘하지 않음’을 실천하는 데 열심을 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거나 빈둥거리는 것이 삶의 악덕이라는 선전에 속아 살았다. 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손발을 놀려 쓸모가 있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범속한 철학의 신봉자였다. 하지만 시골에 와서 심심함 속에서 머리를 텅 비우고 빈둥거리며 지내는 것의 즐거움을 새삼 깨달았다. 일손을 놓고 노는 게 즐거웠다! 어느 날은 위빠사나 수행법 흉내를 냈다. 풀이 자라는 마당을 가로지르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 찰나의 각성 속에서 얼마나 느릿느릿 움직였는지 한 시간을 쓰기도 했다. 누군가 보았다면 실성한 사람이 아닐까 고개를 갸우뚱했을지도 모른다. 시골에 와서 새로 맞은 몇 계절 동안 시골 길을 배회하는 무위 속에서 흘려보냈다. 날카로운 쾌락과 고양감, 혹은 찰나의 강렬한 기쁨을 얻기 위해 술이나 담배, 마약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빈둥거리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빈둥거림은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삶의 중독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였다. 빈둥거리는 날들이 지루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철학자 프로데리크 그로가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썼듯이 “더 이상 정보와 이미지, 상품을 재분배하는 네트워크 안의 한 교차점으로 축소되”는 사회적 “교환망”에서 풀려나와 나는 온전한 자유인이 된 느낌을 만끽했다. 나는 휴식의 완숙한 경지에 들어 잃어버린 섬세함과 온화함을 되찾으며 부지런히 빈둥거리는 동안 스스로에 대해 너그러움을 되찾으며 ‘빈둥거림보다 더 바쁜 삶은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물론 빈둥거림은 공짜가 아니다. 몇 해 동안 금광농협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신문잡지에 죽을 둥 살 둥 글을 연재하는 한편, 부지런히 책을 읽고 날마다 쓴 글을 모아 책을 펴냈다. 노자와 장자를 옆에 끼고 날마다 읽으며 책 마흔 권쯤을 써내는 동안 내 인생의 장년기는 지나갔다. 안성 시대는 막을 내렸다. 영농후계자 따위 허황한 꿈은 접은 채 책이나 읽으며 노년을 고요히 지내려고 한다. 오늘은 일찍 헤이리 집필실로 나가 서가의 책들을 정리하고, 구해놓고 미처 완독하지 못한 황석영 신작소설 ‘철도원 삼대’를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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