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무덤덤한 일본의 세기 말

입력 2019-04-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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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경 국제경제부장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대부분이 ‘세기 말’을 한 차례 겪었다. 2000년을 앞뒀던 1999년. 당시 세계는 ‘밀레니엄’이니 ‘Y2K’니 하면서 아무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시대에 대한 막연한 불확실성에 휩싸였었다.

이웃나라 일본은 지금 또 한번의 세기 말을 경험하고 있다. 아키히토(明仁) 현 일왕이 고령을 이유로 생전 퇴위(살아 있는 동안 왕위를 왕세자에게 넘기는 것)하면서 5월 1일부터 헤이세이(平成, 현 연호) 시대가 막을 내리고 아들 나루히토(德仁) 시대인 ‘레이와(令和)’ 원년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연호는 원래 천재지변이나 전염병 등을 계기로 바꿨다. 그러다가 메이지(明治) 이후에는 왕이 바뀔 때마다 연호를 변경하는 일세일원(一世一元, 잇세이이치겐) 제도를 채택했다. 그때부터 연호는 정치와 경제, 서민 생활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시대 분위기를 적극 반영했다.

예를 들어 메이지(1868~1912)는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근대적인 국가 만들기에 매진한 시대로, 다이쇼(大正, 1912~1926)는 시민사회와 대중 문화의 싹을 틔운 시대로, 쇼와(昭和, 1926~1989)는 패전과 복구, 더 나아가 고도 성장의 시기로 각각 시대 분위기를 담았다고 한다.

아키히토 시대에 써온 헤이세이(1989~)는 ‘평화를 이루다’라는 의미다. 그러나 헤이세이는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린 버블 붕괴 후 장기 침체, 한신 대지진과 동일본 대지진 등 인재(人災)와 천재(天災)의 우울이 열도를 덮친 시대였다. 아키히토 일왕 말마따나 ‘전쟁이 없는 시대’이긴 했다.

다음 달 1일부터 시작되는 ‘레이와’는 ‘질서(令, order)’와 ‘평화, 조화(和, harmony)’를 의미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현재 세계는 분열과 대립이 팽배하다. 그 중심에 아베 신조 정권도 예외는 아니다.

작년 12월 23일 아키히토 일왕의 재임 중 마지막 생일 연설을 돌이켜보면, 과거사를 둘러싼 일본 정부의 행보에 대한 큰 아쉬움이 묻어난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이 전쟁 없는 시대로 끝나게 돼 진심으로 안도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목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라졌다는 것, 일본이 전후에 건설한 평화와 번영이 이 수많은 희생과 일본 국민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위에 건설된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고 했다.

2차 세계대전 중 아버지 히로히토(裕仁) 일왕 시대에 일어난 일본의 행위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실, 아키히토의 유년 시절은 전쟁과 피난으로 점철됐다. 일본은 아키히토 3세 때 중일전쟁을, 8세 때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11세 때 그는 일본의 패전을 지켜봤다.

정치적 권한도 없는 상징적인 왕이었지만, 그는 부친과 달리 재임 중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다. 또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군(軍) 원수직을 지니지 않은 유일한 일왕이기도 했다.

이런 그의 행보는 아베 신조 정권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종전 70주년을 맞은 2015년, 아키히토 일왕은 과거사를 깊이 반성한다고 했지만, 아베 총리는 “전쟁과 관계없는 젊은 세대에게 사죄를 계속하게 할 순 없다”며 반기를 들었다.

즉위를 앞둔 나루히토 왕세자의 책임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일본 왕실의 권위는 예전만 못하고, 직계 자손이라고는 외동딸 아이코 공주뿐인데, 여왕제로 법을 바꾸지 않는 이상 시집을 가게 되면 대(代)가 끊길 수도 있다. 극우화하고 있는 아베 정권에 유일하게 대척점에 설 수 있었던 부친 아키히토 일왕의 소신을 계속 밀고 나갈 수 있을까.

현재 일본은 영유권 분쟁과 교과서 왜곡, 위안부 문제 등으로 주변국들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다. 하지만 후대에 레이와는 평화와 조화를 이룬 시대였다고 평가받는 날이 오길 바란다. sue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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