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의 햇살과 바람] 순서의 상실 시대를 살며

입력 2018-05-25 11:38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내 기억 속에는 과일이 바로 계절인 시절이 길다. 수박 참외는 여름이고 딸기는 5월이며 감은 가을이고 배 사과가 그 뒤를 이었다. 그 계절에 그 과일이 확실히 존재했던 것이다. 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라일락이 피면 봄이며 아까시꽃이 피면 여름으로 치닫는 계절인 것이다. 장미는 5월이며 학교나 집 낮은 담을 타오르며 간드러지게 웃는 줄장미는 6월로 기억하고 있다. 코스모스는 가을이며 국화가 피어나도 우리는 그것을 가을이라고 불렀다.

과일이며 꽃의 종(種)이 외국에서 유입된 것이 너무나 다양하고 이름조차 모르는 과일이며 꽃이 많기도 하지만 내 기억 속의 과일이며 꽃은 아직도 수박은 여름, 감은 가을이며 개나리는 봄이고 코스모스는 가을인 것이다.

그런데 그 계절을 알리는 순서가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겨울에도 수박을 볼 수 있고 가을에도 딸기를 먹을 수 있으며 코스모스는 여름에도 만발하여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지난봄도 그랬다. 순서를 짓뭉개고 하나같이 함께 피어오르는 것이다. 산수유가 개나리가 진달래 철쭉이 조팝나무가 이팝나무가 한꺼번에 피어올라 애들이 마치 달리기를 하듯 서로 먼저 피려고 안달하는 것같이 보였다. 계절을 무시하고 제맘대로 피는 것 처럼 정신이 없었다. 꽃을 즐기고 꽃들과 차례로 인사하는 시간도 없이 숨차게 막 피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꽃집에 가면 무슨 계절이건 장미 카네이션을 볼 수 있고 국화도 마찬가지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이육사는 읊었고,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에서 가을을, 근심 많은 누이의 일생을 국화로 표현했다.

지금은 모두 그 시점이 달라졌다. 청포도는 4월에도, 5월에도 마트에서 풍성함을 자랑하고 국화는 어느 계절에도 만날 수 있다. 김영랑의 모란도 이젠 언제 피어날지 모른다. 모란이 피어야 봄이고 모란이 지면 봄도 사라진다고 했던 시인 영랑의 봄도, 진달래꽃을 가시는 님의 발길에 뿌린다는 김소월의 봄도 이젠 믿지 못할 봄이 되어간다. 우리는 순서가 실종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순서를 젊은이들은 촌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옷도 그렇다. 내 기억에는 분명 여름옷 겨울옷이 있었다. 요즘은 겨울에도 소매 없는 옷을 입은 여성이 있고 여름에도 가죽옷을 입은 남성이 있다. ‘멋’이라는 이름으로 앞서가면서 “남과 다르게”라는 멋의 질서를 자기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 꽃처럼 과일처럼 인간사회에도 그 순서라는 것이 깨져 버릴까 걱정된다. 아니 이미 깨져버렸다고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인간사회에 이것이 깨져 버리면 모든 것이 파산지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인은 그냥 사람이 아니다. 촌부라도 그가 살아온 세월은 바로 우리의 지침서가 되기도 한다. 존경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 속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를 감당하며 고통을 들어 올렸나를 생각하면 존경심은 순리일 것이다.

순서는 아름다운 일이다. 내가 승복하지 못하는 말 중에 “요즘은 다 그래요”라는 게 있다. 요즘이라고 인간의 순서가 없겠는가. 온난화라는 이름으로 과일이며 꽃이 계절의 순서를 잃었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만은 “요즘”이라는 시간성에 너무 기댈 일이 아니다. 인간 본성민큼 소중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지난해 가장 잘 팔린 아이스크림은?…매출액 1위 공개 [그래픽 스토리]
  • 개인정보위, 개인정보 유출 카카오에 과징금 151억 부과
  • 강형욱, 입장 발표 없었다…PC 다 뺀 보듬컴퍼니, 폐업 수순?
  • 큰 손 美 투자 엿보니, "국민연금 엔비디아 사고 vs KIC 팔았다”[韓美 큰손 보고서]②
  • 항암제·치매약도 아닌데 시총 600兆…‘GLP-1’ 뭐길래
  • 금사과도, 무더위도, 항공기 비상착륙도…모두 '이상기후' 영향이라고? [이슈크래커]
  • "딱 기다려" 블리자드, 연내 '디아4·WoW 확장팩' 출시 앞두고 폭풍 업데이트 행보 [게임톡톡]
  • '음주 뺑소니' 김호중, 24일 영장심사…'강행' 외친 공연 계획 무너지나
  • 오늘의 상승종목

  • 05.23 장종료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96,651,000
    • +0.39%
    • 이더리움
    • 5,352,000
    • +4.25%
    • 비트코인 캐시
    • 699,500
    • +0.5%
    • 리플
    • 730
    • -0.54%
    • 솔라나
    • 242,400
    • -2.42%
    • 에이다
    • 667
    • -0.15%
    • 이오스
    • 1,173
    • -0.26%
    • 트론
    • 164
    • -2.38%
    • 스텔라루멘
    • 153
    • +0%
    • 비트코인에스브이
    • 91,900
    • -1.61%
    • 체인링크
    • 23,010
    • -0.09%
    • 샌드박스
    • 633
    • -0.47%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