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영화판, 세상판] 외화(外畵)와 양화(良畵) 사이, 그 정신적 골에 대하여

입력 2017-03-1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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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경제권에서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할지 모르겠으나, 영화계에서는 종종 외화(外畵)가 양화(良畵)를 선도한다. 좋은 외화는 얼마든지 있다. 한국 영화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솔직히 아직은 그 다양성에서나 깊이 면에서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예컨대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를 보고 있으면 기이한 자괴감에 빠져 든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 상에 찾아 든 9개의 ‘셸(shell)’, 곧 괴(怪)우주선 혹은 UFO를 두고 사람들은 패닉(panic) 상태에 빠지는데, 도대체 이들이 왜 우리에게 찾아온 것인지 그 이유와 동기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궁금하면 폭력적으로 된다. 무지(無知)는 공포를 낳고, 그 혼란은 사람들을 불신과 불통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영화에서 단 한 사람, 그러니까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만이 외계인들과 교감하기에 이른다. 거대 문어를 닮은 외계 생물체는 루이스에게 선물을 안겨 주는데, 그녀는 이들에게 부여받은 재능(gift)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시간은 현재에서 과거, 미래로 아니면 미래에서 과거, 현재로 자유롭게 떠다니기 시작한다. 루이스가 그들에게서 얻게 된 ‘능력’은 과연 좋은 것인가, 아니면 나쁜 것인가. 선(善)인가 악(惡)인가. 인류 모두가 그녀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영화는 꽤나 실존적 고민의 화두를 던지는데 그 깊이가 남다르다.

영화 ‘컨택트’는 우주 전쟁의 비주얼을 기대했던 관객들을 ‘배반’하지만 그 정서적 울림의 상당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시선을 거두지 못하게 만든다. 할리우드가 놀라운 것은 대규모 제작비를 들여 이렇게 대중적이지도 않고 상업적이지도 않은, 철학적인 내용의 SF영화를 만든다는 데에 있다.

한국 영화계에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래서 요즘 유행어처럼 자괴감이 든다는 것이다.

우리 영화계는 현재 역사적인 문제와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선까지만 다다른 상태이다. ‘암살’과 ‘내부자들’, ‘더 킹’ 등은 그런 면에서 훌륭한 작품이지만, 이들 영화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사람들이 다시 꺼내 볼 걸작 반열에 올라서 있다고까지 하기는 솔직히 어렵다. 한국 영화가 지금 성취해야 할 부분은 그래서, 그렇다면, 그리하여, 그렇기 때문에 바로 ‘철학성’이다.

뛰어난 외화를 보고 있으면 한국에서는 아직 이런 류의 작품들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답답증을 느끼게 된다. 한편의 영화를 더 예로 들면 ‘메이플소프’ 같은 다큐멘터리가 있겠다.

원제가 ‘메이플소프 : 룩 앳 더 픽처(Mapplethorpe : Look at the picture)’인 이 다큐멘터리는 1970 ~ 1980년대 유명세를 떨쳤던 희대의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이야기를 다룬 일종의 전기물(傳記物)이다. 영화 속에는 그의 다양한 사진들이 소개되는데, 보수적 기조의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겁을 할 만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동성애자들의 기이한 성행위가 줄곧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마치 덴마크의 H.R.기거의 포르노적 상상력의 그래픽 아트(그가 만든 영화 ‘에일리언’의 형상을 보라)의 기원(起源)이 느껴진다. 한편으로 메이플소프의 꽃 사진을 보고 있으면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렇게 경계를 뛰어넘는 다큐멘터리가 한국에서 나올 수 있을까. 외화 ‘메이플소프’의 수입사는 현재,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상영 불가 판정을 받을까 봐, 적어도 상당 장면을 블러(blur) 처리하라는 조치를 받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얼마 전 국회에서 했던 정치풍자 전시회를 두고 터져 나왔던 사회적 논란을 생각하면 충분히 근거가 있는 우려임에 틀림이 없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가, 극장가가, 영화계가, 얼마만큼의 예술적, 철학적 사유를 밑바탕에 깔고 있느냐의 문제와 직결돼 있는 것이다.

예를 들 수 있는 외화는 얼마든지 있다. 케이시 애플렉 주연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같은 영화가 한국에서 성공하려면 기나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탄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흥행에서 실패했다. 사람들은 크나큰 상처를 받고 살아 가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도 그 트라우마에 대한 얘기를 그린 영화는 외면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극장들이, 배급사들이 이런 류의 영화를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병헌 주연의 우리 영화 ‘싱글 라이더’가 개봉 과정에서 제값을 인정받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수작에 속하는 일본 영화 ‘아주 긴 변명’은 사람들이 상영하는지 잘 알지도 못한 채 사라졌으며, 곧 개봉될 또 다른 일본 영화 ‘오버 더 펜스’는 개봉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극장 스크린 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게 다 국내 극장 문화의 부박(浮薄)한 현실 탓이다. 영화계가 그 현상을 뚫고 본질인 철학성을 담보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정신적 사조(思潮)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제는 진정 물질에서 정신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기이다. 새로운 매니페스토(선언)가 나와야 하는 시점이다. 현상이 아닌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 영화계에서 시작된 그와 같은 ‘정신적 진보’는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사드 배치를 둘러싼 국제적 분쟁, 악화일로(惡化一路)로 치닫고 있는 남북 분단의 군사적 상황과 같은 현상 모두를 해결할 본질적 단초(端初)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세상사 모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법이다. 그걸 모르는 자, 위정자(爲政者)가 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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