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라스푸틴, 러시아 마지막 황실을 농단하다

입력 2016-11-0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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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 당장 이 글이 이투데이에 실린 후 대여섯 시간 지나면 클린턴이냐 트럼프냐 둘 중 하나가 미국 대통령으로 판가름이 나는데도, 한국인 누구도 이런 세계적 뉴스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관심사는 단 하나, ‘박근혜-최순실 스캔들’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 모두 지금 무당의 주술에 홀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청와대를 삼킨 주술이 전국을 마비시키더니, 급기야 외신마저 지금의 정국을 ‘무속인 예언자 목사의 카리스마에 희생된 대통령’ 또는 그런 나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30일자 워싱턴포스트가 보도한 ‘샤머니즘이 판치는 나라’의 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순실) 씨는 서울의 주한 미국 대사관이 2007년 보낸 외교 전문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목사로 묘사한 무속인 고(故) 최태민의 딸이다. 한국에서 최태민은 1974년 어머니가 피살당한 후의 박근혜를 조종한 ‘한국인 라스푸틴’으로 여겨진다.”, “최태민 목사가 박근혜의 인격형성기에 몸과 영혼을 지배한 결과, 그의 자식들이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루머가 팽배하다.”

그 라스푸틴은 과연 누구인가? 이번 ‘세계는 지금’ 테마로 라스푸틴의 정체를 고른 건, 그래서 독자 모두를 라스푸틴이 판치던 ‘그때의 세계’로 안내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1916년 12월 18일 새벽, 제정 러시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한복판을 관류하는 네바 강 얼음 구덩이에서 시신 하나가 발견됩니다. “시신의 나이는 50세 미만, 중키에 키 높은 장화 차림의 두 다리는 물론 손목도 밧줄에 묶여 있었고, 오른쪽 눈은 흉기에 맞아 찌그러졌고, 그의 성기는 으깨어져 있었다.”(출처 구글·위키피디아)

곧바로 달려온 경찰에 의해 시신은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황가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최측근이자 황후 알렉산드라와 공주들, 귀족 부인들을 농락하고, 심지어 자기 집 간호사까지 성폭행한 황실의 고문 겸 러시아 희랍정교의 수도사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당시 47세)으로 밝혀집니다. 시신에서는 세 발의 권총 탄알이 발견됩니다.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라스푸틴은 1869년 시베리아의 포크로부슈크 마을에서 우편집배원의 아홉 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납니다. 열여섯 살 되던 해 결혼해 세 자녀를 둔 가장이었으나, 스물세 살이 되자 집을 떠나 희랍정교회 수도사가 되면서 러시아 여러 성지를 순례, 영적 체험을 통해 영험한 심령치료사로 변모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로마노프 황실에까지 퍼져 황후 알렉산드라와 대면하게 됩니다. 이는 황태자 알렉시우스의 몸에 나타난 악성 종기 때문으로 알려졌습니다.

시의(侍醫)의 진단에 따르면 황태자는 혈우병 환자로, 그의 종기를 수술할 경우 혈우병을 자극해 사망에 이를 수 있어 어느 의사도 수술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아들의 병세를 듣고 기절한 황후에게 라스푸틴은 고질(痼疾)을 기도로 치료했고, 라스푸틴에 대한 황후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신임은 확고부동해집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당시 주러시아 영국대사 조지 부캐넌이 남긴 회고를 정치학자인 김학준은 자신의 역저 ‘러시아 혁명사’에서 이렇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 자력 또는 어떤 형태의 최면술에 의해, 라스푸틴은 귀여운 소년이자 부모들의 우상이었던 황태자의 고통을 여지없이 덜어주었다. 황후는 그때부터 라스푸틴을 연모의 감정으로 대했고, 라스푸틴의 타락한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절대로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라스푸틴은 언제나 비난받을 수 없는 사람이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옛날의 성자들처럼 저주받고 박해받는 사람이었다.”

또 황태자의 치료에 나선 라스푸틴이 황후에게 속삭이던 귓속말에 관해 당시 황실 출입이 자유로웠던 러시아 외교관 니콜라스 바실리(훗날 미국으로 망명)가 남긴 기록은 이러합니다. “딸이여, 어제 밤새도록 나는 마치 선지자 야곱이 하나님과 밤새도록 싸웠듯, 그대 아들의 목숨을 위해 하나님과 싸웠소. 나는 싸워서 기어코 승리했소. 하나님은 나에게 ‘그 어린이는 목숨을 건질 것이다’라고 말했소.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좀 별난 이야기도 했소. 내가 살아있는 한 그대들 역시 살고 번영할 것이나, 내가 죽을 때 그대들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고.”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라스푸틴의 궁정 지배는 더욱 뚜렷해집니다. 정부 고관 자리도 라스푸틴이 떼었다 붙였다 하자, 라스푸틴을 제거해야 한다는 중론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총사령관이자,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숙부 니콜라이 대공(大公)이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라스푸틴에게 총사령부를 방문, 장병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뒤 그를 전쟁터로 끌어내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라스푸틴이 황후에게 니콜라이 대공을 총사령관에서 해임토록 황제를 설득하라고 말했고, 니콜라이 대공은 결국 해임되고 맙니다. 같은 경위로 외무대신과 내무대신이 차례로 자리를 빼앗깁니다.

무엇보다도 가관은, 황제가 해임된 니콜라이 대공의 후임이 되어 전선에 임한 것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태후(나폴레옹의 함락 후 ‘신성동맹’을 주창한 알렉산더 3세의 황후)가 전지의 아들을 찾아와 수도로 당장 돌아가자고 간청했으나 아들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머니, 라스푸틴은 우리의 은인이자 하나님이 보낸 사람입니다”라고 말했고, 태후는 다시 “니키, 정신 차려! 지금 네 아내가 라스푸틴과 동침하고 있다는 소문이야. 어서 함께 돌아가자!”고 호소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시민들이 들끓기 시작합니다. 황후를 수녀원으로 내쫓고 황제를 퇴위시킬 것, 그리고 라스푸틴을 처형하고 니콜라이 대공을 니콜라이 3세로 즉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여기에 전세마저 독일군에 한창 밀리던 무렵인지라, 독일 다름슈타트 출신의 독일계 황후를 궁정에서 당장 몰아내자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라스푸틴의 암살 음모는 거세졌고, 마침내 왕정주의자인 귀족 거부 펠릭스 유수포프가 그 총대를 메고 나섭니다. 라스푸틴의 호색 기질을 익히 알던 유수포프는 니콜라이 황제의 조카딸로 절세 미녀인 아내 이리나를 미끼로 라스푸틴을 자기 집 지하식당으로 유인, 육군 장교 수코틴과 군의관 라조베르트와 짜고 권총으로 사살했습니다. 그 시신을 네바 강에 버리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만, 사건은 의문투성이로 종결됩니다. 라스푸틴이 암살당하기 직전 니콜라이 황제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예언의 편지가 그 첫째입니다.

“나는 내년 1월 1일 이전에 죽을 것이라 느낍니다. 내가 만약 농민의 손에 죽는다면 당신은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 만일 귀족의 손에 죽는다면 이 나라엔 귀족이 없어질 것이고…(중략)…당신의 자녀들과 친척들 모두가 2년 내 죽을 것입니다.” 괴승(怪僧)의 예언은 이듬해 터진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적중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섬뜩한 건, 지금의 서울이 ‘샤머니즘이 판치는’ 통곡할 나라로 바뀐 것을 곰곰이 따진즉, 그가 죽고 정확히 100년 되는 해의 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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