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美 대선 뒤집으려는 푸틴의 사이버해킹

입력 2016-10-1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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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64)의 경력을 캐다 보면 진절머리 쳐지는 몇몇 대목과 만납니다.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법대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소련 비밀경찰(KGB)에 투신, 해외 첩보공작 장교로만 16년간 봉직하다 중령으로 예편하고 정치에 발을 들이기 위해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진출합니다.

그곳에서 소련 와해 직후의 크렘린을 쥐락펴락하던 고르바초프와 옐친 사이를 오가며 한참을 저울질하다 마침내 옐친을 선택, 1996년 옐친 대통령 캠프에 뛰어들면서 승승장구합니다. 소련연방보안국장, 국가보안위원회 서기를 거쳐 옐친의 최측근으로 부상하더니 1999년 옐친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의 자리를 놓고 강적 유리 스쿠라토프 검찰총장을 상대로 죽기살기 한판 대결을 벌입니다.

정적을 제치는 푸틴의 실력 역시 첩보공작원 출신답습니다. 스쿠라토프가 호텔방에서 두 명의 여인과 동침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입수, 크렘린 요로에 돌림으로써 그해 연말 대통령 권한대행 자리를 성큼 따낸 것입니다. 스쿠라토프가 훗날 “첩보공작의 도사 푸틴이 작심하고 벌인 ‘꿀 함정(honey trap)’에 빠졌던 탓”이라고 털어놓은 해명으로 비춰, 그가 호텔방에 발을 들인 것부터가 푸틴의 유인공작이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스쿠라토프는 복수 겸 해명을 위해 2000년 대선에 출마합니다만, 개표 결과는 너무 참담했습니다, 푸틴 53%, 유리 스쿠라토프 1%. 스쿠라토프를 겨냥한 푸틴의 첩보공작은 따지고 보면 바로 이 대선을 노린 사전 포석이었던 것입니다. 푸틴의 이러한 2000년식 첩보공작은 그 후 인터넷 개발과 더불어 해외공작의 새로운 전형으로 바뀝니다. 사이버 해킹이 바로 그것으로, 오늘로 정확히 22일 남겨둔 미국 대통령선거(11월 8일)마저 러시아 사이버 해킹의 공격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달 ‘세계는 지금’의 테마로 푸틴의 사이버 해킹을 고른 건 그래서입니다.

푸틴이 사이버 해킹 대상으로 미 대선을 겨냥한 이유는 단 하나,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는 그녀의 국무장관 시절부터 우크라이나 침공과 시리아 사태를 놓고 사사건건 원한 관계로 이어져 왔습니다. 트럼프 또한 푸틴을 대놓고 지원, 힐러리를 상대로 벌인 1차 TV토론(9월 26일)에서 그를 두둔하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남깁니다.

“지난번 민주당전당대회(DNC) 사건의 배후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확실치 않다. 물론 러시아일 수도, 중국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3국, 이도 저도 아니면 개인일 수도 있다.”

트럼프는 TV토론에 출연하기 앞서 민주당 전당대회 사건에 러시아 사이버 공작원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미 CIA로부터 브리핑받은 상태였지만, 말을 이렇게 바꾼 것입니다. 여기서 트럼프가 거론한 민주당 전당대회 사건이란 7월 29일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가 공식 확정되던 날, 대회에서 당 핵심 간부들이 버니 샌더스(버몬트) 상원의원을 훼방하려던 정황을 보여주는 이메일이 폭로 전문 사이트에 공개된 사건을 말합니다. 이 논란으로 데비 와서먼 슐츠 민주당 전국위(DNC) 의장이 사임했습니다.

민주당 전당대회를 해킹한 푸틴이 그 여세를 몰아 이번 대선을 뒤집으려 사이버 공작원을 투입해 왔다는 사실은 백악관은 물론 여야와 언론가에도 널리 알려진 중론입니다. 10일자 타임지(誌)가 “러시아, 미 대선의 전복 기도-러시아의 해킹에 속지 말라!” 제하의 커버스토리를 낸 것도 이 때문입니다.

미 대선을 3주 남기고 타임이 집중 조명한, 푸틴의 외국 선거 농간의 선례를 보면 가히 한 편의 첩보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푸틴의 사이버 해킹으로, 우선 옛 소련연방에 속했던 독립국가연합(CIS)들의 선거 기축이 차례로 무너져 내립니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우크라이나입니다. 2014년 5월 25일 치러진 대선 사흘 전, 그 나라 중앙선관위의 컴퓨터가 전국적으로 먹통이 됩니다. 사이버구조대의 급거 출동으로 선거 하루 전날에 겨우 정상화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사이버구조대 대원들은 ‘사이버 버컷(Cyber Berkut)’이라는 러시아 보안첩보부대 소속 사이버 해킹단체의 장난임을 알아냈습니다. 그대로 방치했다면, 그 나라를 침공한 러시아가 바라는 대로 우크라이나 내 극우 군부집단의 선거 우세가 러시아 전역에 그대로 방영될 뻔했습니다.

▲'러시아, 미 대전의 전복 기도-러시아의 해킹에 속지 말라!'는 커버스토리를 실은 10월 10일자 타임지.
▲'러시아, 미 대전의 전복 기도-러시아의 해킹에 속지 말라!'는 커버스토리를 실은 10월 10일자 타임지.

러시아가 서구 나토(NATO) 국가를 상대로 펼쳐 온 일련의 사이버 해킹은 더욱 리얼합니다. 8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그녀가 이끄는 기민당 핵심 당원들의 인터넷에 ‘진종(珍種)의 곰(Fancy Bear)’이라는 괴 단체의 서명이 든 메일이 전달됩니다. 메일에는 독일에 밀려든 이민자들한테 강간당한 한 러시아 소녀의 탄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독일 사이버 방어 책임자 아르네 쇤봄의 진단에 따르면, 이 메일은 내년 치러질 총선에서 현 집권당인 기민당을 누르고 우익 야당 AfD의 승리를 이끌어 내려는 러시아의 음모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메일로 9월 메르켈 총리의 홈그라운드에서 치러진 1차 선거에서 AfD당 후보가 실제로 집권 기민당 후보를 제치는 이변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가 당한 피해도 예외는 아닙니다. 2014년 11월 크렘린의 입김이 작용하는 파리의 한 은행이 극우 르펭 후보가 이끄는 국민전선(FN)에 900만 유로를 융자, 1년 후로 닥친 지역 선거에 대비토록 지원했습니다. 또 2015년 4월에는 프랑스의 방송 TV5몽드를 해킹, 일체의 방송을 중단하고 18시간 내내 이슬람국가(ISIS)의 서명이 든 검정 깃발 사진만이 화면에 뜨도록 만들었습니다. 이후 프랑스 사이버수사대와 영국 수사대(GCHQ)의 합동조사 결과, ISIS가 아닌 ‘진종의 곰’의 농간임이 밝혀졌습니다.

영국도 당연히 해킹 대상이었습니다. ‘타임스’는 러시아의 사이버 공격 단체 ‘진종의 곰’이 2015년 5월 7일의 대선을 겨냥, 국영 TV방송 등 대부분의 방송사를 해킹했으나 GCHQ의 선방으로 총선을 무사히 치렀다고 보도했습니다. 당시 모든 방송이 해킹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크렘린이 뒷돈을 대온 ‘모스크바 RT’ 방송은 총선기간에 방송 시간을 오히려 24시간 체제로 늘려, 한 가지 사실만을 강조 방영했습니다. “민주주의가 최상의 것만은 아니다”라는 멘트를 반복해, 지금 미국의 대선을 노리는 러시아 해커팀과 목표점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미 대선을 겨냥한 러시아의 이 같은 사이버 해킹에 대해 미 조야(朝野·정부와 민간)는 엄중 대처해 왔습니다. 7월 27일 라오스에서 열린 아세안지역 안보포럼에 참석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러시아의 세르게이 라브로브 외상에게 “미 대선을 농간하려는 어떠한 노력이나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습니다.

또 미 백악관 고위 관리가 타임지에 흘린 제보에 따르면, 9월 6일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때 오바마 대통령은 90분간의 미·러 정상회의 도중 푸틴을 별실로 불러내 측근의 배석 없이 독대, 러시아 측 사이버 해킹의 즉각 중단과 자제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관한 오바마 대통령의 의중은 양국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답변으로도 나타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미국의 사이버 능력은 공격이나 방어 어느 면에서건 세계 최상이라는 사실을 밝혀둡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러시아에 대한 반격을 삼가는가? 이 문제에 대해 타임지가 여러 명의 미 공안 책임자들을 상대로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반격할 경우 미국의 대간첩 첩보작전이 공개되기 때문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미 공안 책임자 대부분은 러시아의 사이버 해킹으로 당할 미국 측 피해에 관해서는 부정적입니다. 조지아 주 케네소 주립대에서 ‘선거 제도론’을 강의해 온 메르 킹 교수는 “미 전역에 널린 9000여 개 투표소 어디든 컴퓨터와 일체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풀이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역 선관위별로 분산 관리해 온 투표자 명부가 해킹당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일은 없다”고 장담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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