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 풍경] 저 산을 지키는 참나무들

입력 2016-10-14 11:03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최근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산을 몇 번 다녀오면서 산에서 자라는 나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다. 산에 사는 어떤 새가 그 숲과 나무를 지킨다고 하면 우리는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그 의미를 상징적으로 받아들인다. 숲 속에 사는 것만으로도 새는 숲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새가 단순히 지키는 것을 넘어 숲을 가꾼다고 하면 그 의미는 또 조금 달라진다.

산에 가면 어치라는 새가 있다. 몸길이는 까마귀나 까치 정도만 하고, 참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를 즐겨 먹는다. 새의 분포 지역도 참나무 분포 지역과 일치한다. 도토리 열매가 많은 우리나라는 전역에서 이 새를 볼 수 있다. 수십 마리씩,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이 떼를 지어 무리 생활을 하며 한번 집단으로 울기 시작하면 온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끄럽다.

새들은 대개 먹이를 저장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생기면 먹고, 없으면 또 그걸 찾아 온 산과 들을 헤맨다. 그런데 다른 새들과 달리 어치는 먹이를 저장하고 숨겨두는 습성이 있다. 떼를 지어 생활하면서도 자기만 아는 어떤 장소에 열심히 도토리를 모아놓는 것이다. 사람도 가끔 자기가 물건을 둔 곳을 잊을 때가 있는데, 새인 어치는 여간하겠는가.

어치가 열심히 숨겨놓고 잊어버린 도토리가 싹을 틔우고, 그것이 다시 거대한 참나무 숲으로 변한다. 독일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검은숲’도 처음엔 어치가 가꾼 것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의 참나무 숲도 어치의 건망증으로 일 년에 수만 그루의 새 나무가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새의 건망증으로 숲이 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새가 가꾼 참나무는 또 그런 새들과 다른 생물들의 은혜에 어떻게 보답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오래전 강원도 정선에 놀러갔을 때, 그곳 산속 마을에 사는 어느 할아버지로부터 들었다. 산에서 나는 도토리는, 어느 해는 정말 놀랄 정도로 많이 열리고 또 어느 해는 아주 조금밖에 열리지 않는다. 많이 열리는 해엔 참나무와 갈나무 숲에 저절로 생긴 작은 구덩이들이 도토리로 가득 차 기도 한다.

그 이유를 산속 마을 할아버지에게 들은 것이다. 도토리를 맺는 나무가 바로 참나무인데, 이 나무가 가을에 들농사 흉년이 들 것 같은 해는 그걸 미리 알고 여름부터 열매를 잔뜩 맺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까, 예전부터 전해오는 말이 그렇다고 했다. 들판에 흉년이 들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먹을 게 부족한데, 그럴 때 제 몸의 도토리라도 많이 맺어 산 신구와 들 식구들 먹여 살리려고 그런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으로 참나무가 도토리를 많이 맺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학술적으로 검증된 것도, 검증할 일도 아니다. 산속에서 오래 산 할아버지의 말이니 검증된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오랜 경험으로 볼 때 그렇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니 어떤 사람이 제법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해주었다. 봄에 모내기를 할 무렵 비가 자주 많이 오면 아무래도 농사에 도움이 돼 풍년이 든다. 그러나 이 시기에 비가 많이 오면 바로 이때에 꽃을 피우는 참나무는 꽃가루 수분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없다. 반대로 모내기를 할 시기에 가물면, 들농사는 그해 흉년이 들어도 참나무는 꽃가루 수분을 마음껏 할 수 있어 도토리를 많이 맺는다는 것이다. 들어보면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생각이고 합리적인 이유다.

그러나 세상 만물의 이치가 어디 합리적인 생각과 합리적인 이유로만 흘러가던가. 산에 사는 어치가 자기만의 먹이 저장 방식으로 참나무와 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숲을 가꾸듯 이렇게 가꾸어진 참나무들이 들판에 흉년이 들 때 산 식구와 들 식구를 보살피는 마음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여기며 사는 것도 산속 마을 사람의 합리적인 생각일 수 있다.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바로 그런 아름다운 세상살이다. 우리가 한세상을 살며 저 산속의 어치로부터도 또 참나무로부터도 이렇게 배울 것이 많다. “가을산과 친정은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지난해 가장 잘 팔린 아이스크림은?…매출액 1위 공개 [그래픽 스토리]
  • 개인정보위, 개인정보 유출 카카오에 과징금 151억 부과
  • 강형욱, 입장 발표 없었다…PC 다 뺀 보듬컴퍼니, 폐업 수순?
  • 큰 손 美 투자 엿보니, "국민연금 엔비디아 사고 vs KIC 팔았다”[韓美 큰손 보고서]②
  • 항암제·치매약도 아닌데 시총 600兆…‘GLP-1’ 뭐길래
  • 금사과도, 무더위도, 항공기 비상착륙도…모두 '이상기후' 영향이라고? [이슈크래커]
  • "딱 기다려" 블리자드, 연내 '디아4·WoW 확장팩' 출시 앞두고 폭풍 업데이트 행보 [게임톡톡]
  • '음주 뺑소니' 김호중, 24일 영장심사…'강행' 외친 공연 계획 무너지나
  • 오늘의 상승종목

  • 05.23 장종료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93,514,000
    • -2.58%
    • 이더리움
    • 5,236,000
    • +1.67%
    • 비트코인 캐시
    • 675,000
    • -2.24%
    • 리플
    • 721
    • -0.96%
    • 솔라나
    • 238,500
    • -3.17%
    • 에이다
    • 637
    • -3.78%
    • 이오스
    • 1,134
    • -2.41%
    • 트론
    • 159
    • -4.79%
    • 스텔라루멘
    • 150
    • -1.32%
    • 비트코인에스브이
    • 88,550
    • -2.15%
    • 체인링크
    • 22,190
    • -1.42%
    • 샌드박스
    • 603
    • -4.29%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