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을씨년스럽다

입력 2016-01-1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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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값은 해마다 곱절씩 오르고/ 원화값도 해마다 곱절씩 내리고/ 우리 월급값도 해마다 반값으로 깎이어/ 너절하게 아니꼽게 허기지게만 사는 것도 괜찮다/ …그렇지만/ 어찌할꼬?/어찌할꼬?/ 너와 내가 까놓은/ 저 어린것들은 어찌할꼬?” 미당 서정주가 1965년 1월 1일 발표한 시 ‘신년유감’의 한 구절이다. 새해 첫날 어려운 경제 상황을 걱정하는 시인의 마음이 읽힌다. 5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

‘희망’을 주제로 칼럼을 쓰기 위해 지난해 말 새벽 인력시장으로 취재를 나갔던 회사 선배는 일거리가 크게 줄어든 황량한 거리에서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며 속상해했다. 삶이 힘들고 막막하지만 자식을 생각해 매일 새벽 일을 찾아 나온다는 노동자의 말이 지금도 가슴을 때린다며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했다. 후배 현장 기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고, 신문을 읽어 봐도 2016년은 을씨년스러운 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을씨년스럽다’는 어원부터가 서글프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인 ‘을사늑약’과 관계 있다는 설이 매우 유력하기 때문이다. ‘을씨년’을 ‘을사년(乙巳年)’의 변형으로 보고 있다. 1905년 11월 7일 일제가 이완용 박제순 등을 내세워 강압적으로 늑약을 맺은 그 해가 바로 을사년이다. 우리는 이 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는 등 사실상 일제치하로 들어갔다. 당시 초겨울의 우리 땅에는 웃음소리가 끊기고 침통하고 비장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그래서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날씨가 몹시 어수선하고 침울할 때면 을사년의 비통하고 스산한 분위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고 표현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을사년스럽다’가 ‘을씨년스럽다’로 변해 굳어졌다는 주장이다. ‘을씨년+스럽다’형태로, 명사 ‘을씨년’에 ‘그러한 성질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스럽다’가 붙었다. ‘을씨년하다’로 쓰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1980년대 국정교과서로 국사 공부를 했던 기자는 을사늑약을 ‘을사(보호)조약’으로 배우고 외웠다. 나이 지긋한 학자, 언론인 등이 방송이나 글에서 ‘을사(보호)조약’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순전히 이 잘못된 교육 때문이다. 조약과 늑약은 큰 차이가 있다. 조약(條約)은 국가 간 합의하에 맺은 언약으로, 국제법률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명시적 문서에 의한 ‘합의’를 나타낸다. 반면 늑약(勒約)은 강제성에 의해 체결된, 즉 억지로 맺은 조약이다. 따라서 을사(보호)조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바가지 긁다’라는 말에도 우리의 아픈 민족성이 담겨 있다. 1886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외국에 문호를 개방한 직후인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 콜레라가 돌아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이유는 환자가 발생하면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 무녀(巫女)를 불러 대청마루에서 굿을 벌였기 때문이다. 굿판이 벌어지면 무녀들은 병귀(病鬼)를 쫓는다며 소반 위에 바가지를 올려 놓고 벅벅 긁어댔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바로 ‘바가지를 긁다’이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이 말은 ‘듣기 싫은 소리’의 상징어가 됐고, 나중에는 아내가 남편에게 쏟아내는 불평과 잔소리로 변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열었건만 경제 상황이 영 좋지 않다. 이럴 때는 아내가 사랑을 담아 긁는 바가지라도 결코 약이 될 수 없다. 힘들수록 잔소리는 듣기 싫은 법이다. 극복, 타개, 재기, 희열, 꿈, 행복, 기적 등 희망의 말로 격려를 해야 한다. 긍정적인 말은 바라는 바를 실현시키는 놀라운 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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