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칼럼] 새해 소망, 골목의 부활

입력 2015-12-31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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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지난해 추석을 두어 주일 앞두고 예전에 살던 낡은 아파트로 다시 이사를 했다. 어느새 넉 달이 훌쩍 지나갔는데, 출근길에서 늘 마주치는 생소한 모습은 내게 여전히 신기하기만 하다.

아침 9시를 전후해 아파트 단지 도로변은 노란 버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러시아워를 방불케 하며 지나가고, 평소 눈을 씻고 봐도 눈에 뜨이지 않던 아이들이 무리 지어 엄마, 할머니, 이모 손을 잡고 노란색 버스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 많은 아이가 다 어디 숨어 있다 나왔는지 아직도 내겐 수수께끼다.

며칠 전 노란 버스를 기다리는 유치원생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자니 “내일부터 방학이라는데 아이들하고 집안에서 씨름할 생각을 하니 벌써 스트레스예요”, “유치원 방학 없애면 안 되나요?”, “전 벌써 멘붕이에요” 젊은 엄마들의 넋두리가 들려온다.

요즘 ‘응답하라’ 시리즈가 인기라는데 그건 우리가 잃어버린 것, 두고 온 것, 놓쳐버린 것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결코 작지 않은 탓일 게다. 그러고 보니 잃어버린 것 가운데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억을 담아두었던 골목의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젊은 엄마들의 넋두리가 한몫했음은 물론이다.

골목, 그곳엔 항상 형과 오빠, 언니와 누나가 있었고, 친구와 동생이 있었다. 서로 편을 짜서 술래잡기도 하고, 오자미도 하고, 줄넘기에 공기놀이에 땅따먹기도 하며 우린 신나게 놀았다. 피차 싸우지 않고 너나없이 어울려 놀기 위해 우린 어느 누구도 손해보지 않는 그럴듯한 규칙을 만들려 애를 썼고, 행여 치고박고 싸우거나 눈물을 훔치는 친구들이 생기면 한 살이라도 더 먹은 형이나 언니가 중재에 나서곤 했다.

그러니까 골목은 학교에서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거리의 지혜(street wisdom)’를 배울 수 있는 멋진 공간이었고, 다양한 연령층이 한데 모여 팀워크(?)를 다지면서 몸의 근육은 물론 마음의 근육까지 탄탄하게 키울 수 있는 소중한 장소이기도 했다.

골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놀던 우리가 가장 듣기 싫어했던 말은 “얘들아 밥 먹을 시간이다. 집에 들어와”하는 엄마들 목소리였다. 누군가 집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더 큰 재미가 기다리고 있는 내일을 기약하며 집으로 발길을 돌리곤 했는데…. 그런 골목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기억의 한 자락 속에만 존재하는 그 골목을 다시 살리는 일이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반전(反轉)’이 일어났다. 올해 6월부터 우리 모두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메르스가 골목을 다시 찾아준 은인이 될 줄이야.

이사 오기 전 아파트 단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다. 메르스 덕분에 학교가 잠시 휴업을 하는 동안, 학원도 덩달아 휴강에 들어갔다. 그러자 처음엔 중학생 형과 누나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어울리더니, 다음엔 초등학교 동생들이 아파트 단지를 골목 삼아 밤늦도록 뛰놀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들어오지 않아 안전한 아파트 단지에선 형들의 자전거 경주가 펼쳐지는가 하면 동생들의 스케이트보드 묘기 대행진이 뒤를 잇고, 요요 놀이에 간이 축구에 술래잡기 판이 벌어졌다. 학원 공부에 치이거나 게임에 고개를 묻던 아이들이 건강한 골목의 재미를 만끽하기 시작하자, 어떤 엄마는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목을 축여주기 위해 생수와 얼음을 들고 나왔고, 다른 엄마는 과일 화채를 만들어 돌리는가 하면, 나도 질세라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안기는 아빠도 등장했다.

예전엔 자기 아이(들) 챙기기에 급급했던 부모들 눈에 이웃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서로 데면데면하기만 했던 이웃들이 이젠 “제가 ○○ 엄마예요”, “제 아이가 4학년 2반 △△랍니다”라며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으니, 아이들 골목 덕분에 어른들 이웃이 덤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한 해를 맞이하며 새해 소망을 품어보는 시간, 아파트 단지 곳곳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왁자지껄 들려오고, “○○야 밥 먹을 시간이야”라고 외치는 소리가 익숙해지는 ‘골목의 부활’을 간절히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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