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의 덕수 아내 영자, 바로 내 얘기 아인교…

입력 2015-11-2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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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 여성이 겪은 격동의 현대사- 참여와 배제사이에서 대안 찾기] ④ 문말순씨의 과거, 그리고 현재

▲문말순씨가 인터뷰 도중 약혼 기념사진을 꺼내 보이고 있다. 문씨는 ‘니는 내가 시키는 대로 꼭 거 가야 한다’는 큰오빠의 말을 따라 선보러 가서 이 약혼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문말순씨가 인터뷰 도중 약혼 기념사진을 꺼내 보이고 있다. 문씨는 ‘니는 내가 시키는 대로 꼭 거 가야 한다’는 큰오빠의 말을 따라 선보러 가서 이 약혼사진을 찍었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한국전쟁= 문말순씨는 1945년 경남 창녕군 영산면 성내리에서 8남매 중 딸로는 막내로 태어났다. 평범한 집안의 엄부 밑에서 여자 형제들은 남자 형제와 달리 모두 초등학교 학력에 그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이후에는 본인의 진로 의사와 상관없이 집안 장손인 큰오빠의 부름을 받아 부산에서 조카들을 돌보는 한편 공장 노동자로 받은 급여도 가족을 위해 헌납하는 등 가부장적 가족 질서 안에서 순종적인 삶을 살았다.

만 5세에 겪은 한국전쟁에 관한 기억 또한 총알이 빗발치는 현장 속에서 두 살 터울 남동생이 위험을 알지 못한 채 총놀이하던 모습이나 큰 부상을 입은 집안 어른의 구사일생 후일담에 묻혀, 자신과 올케들이 양식을 구하러 마을로 나갈 때 느꼈을 공포나 부담감에 대해서는 남의 일처럼 얘기했다.

“촌에 가면 ‘가마떼기’가 있다 아입니꺼? 쌀가마니. 그걸 이래 놨는데 총알이 막 날라왔지요. 네 살배기 동생은 그것도 모르고 좋다고 마당으로 나가서는 막 놀았던 기억이 납니더. 우리 식구는 다친 사람이 없는데, 사촌오빠가 그때 뭔 뱅(병)이 걸려서 들고 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배가 찢어졌지예. 그때 창자가 다 나왔는데, 지금도 그 생각이 납니더.”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도 밥을 지어 식구를 먹여 살리는 일만큼은 여성들이 계속 감당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어린 문말순씨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결과이지 싶다.

◇교육= 문말순씨와 비슷한 학력의 해방둥이 여성들이 인터뷰 중에 공통적으로 아쉬움을 토로한 부분은 바로 ‘교육’이다. 남자 형제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 문말순씨는 언니들과 함께 학교 담장 밖에서 놀아야 했다고 한다. 부친은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하지 못하는 한 동네 남학생의 학비를 지원하고 그 인연으로 사위를 삼을 만큼 교육열이나 딸에 대한 애정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성이 하나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라는 인식을 갖지 않으면 경제 상황과 관계없이 늘 이렇게 교육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는 와 그랬든지 몰라. 아부지가 딸은 공부를 하면 안 된다 캐서 그렇고. 남의 집 아들을 아부지가 시캬(시켜)주고 우리 언니는 딸이라고 안 시키고.”

◇사회생활과 경제활동= 문말순씨는 큰오빠와 함께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까지 꽤 오랫동안 방직공장에서 경제활동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많은 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그랬듯 자신이 번 돈으로 자기 옷 한 벌을 사서 입지도 못할 만큼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검소하게 생활한 덕에 성장한 조카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벌었다고 내 혼자 쓴 것도 없고. 그래도 내가 업어 키운 큰조카가 지금 굉장히 잘돼가 있어 보람을 느끼지.”

우리가 이들의 희생에 대해 가족 이데올로기나 여성주의적 가치로 판단하기에 앞서 사실 그녀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가 문말순씨의 이야기에 집중해야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문말순씨 부부.
▲문말순씨 부부.
◇결혼생활= 문말순씨의 결혼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장들끼리의 합의에 의해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니는 내가 시키는 대로 꼭 거 가야 한다’는 큰오빠 말대로 선보러 가서 저 약혼사진을 찍었지.”

그렇게 정해진 배우자가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와도 같은 남자다. 8남매의 장남이었던 그는 결혼하자마자 중동과 동남아시아에서 중장비 관리사로 일하다 귀국해서는 전국의 고속도로 건설현장을 떠돌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가족뿐 아니라 본가 가족의 생계와 학비까지 책임지는, 어쩌면 본인이 관리한 중장비보다 무거운 무게의 삶을 살아야 했고 결국 잘 살아냈다.

“그래 인자 맨날 하는 말이 뒷바라지하다 보니까 맨날 이렇게 몬 산다고.(웃음) 저그들은 다 행님이 이래가 다 해준 줄은 몰라도… 뭐 저거가 생활비 보태준 적도 없고.”

그가 버틸 수 있었던 지지력은 바로 어디든 함께한 아내 ‘말순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어린 남매 둘은 교육 문제로 시아버지가 양육을 자처해 같이 하지 못했으나, 그들은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한다.

말순씨에게도 극도로 조심스러운 결혼 시기가 있었으니, ‘덕수씨’가 해외 근로자로 파견되어 시댁에서 생활하던 때였다. 혹여 외출해서 늦게 돌아오기라도 하면 소설과 영화 ‘자유부인’처럼 비쳐질까 남의 눈과 귀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남편의 급여통장도 시어머니에게 공표할 정도였단다.

“솔직히 그 당시는 내가 만약 친정에 한 번씩 가면은 늦게 올 때가 있다 아입니꺼? 그런데 늦게 오면은 구둣소리, 그때만 해도 젊으니까 구두를 신었다 아입니꺼? 그 구둣소리가 날까 겁이 나 뒷대문을 요래 살짝 오고서는(웃음) 그 구두도 벗고, 맨발로 이렇게 들어오고 했습니더. 남편이 없으니까.”

◇가족계획= 문말순씨 부부의 가족계획은 드물게 남편이 정관수술을 한 경우이지만, 그러기 전에 아내가 잘못된 루프시술로 하혈 끝에 기절하는 등 부작용을 겪은 후 내린 선택이었다는 데에 아쉬움이 있다.

“그때 하혈이 너무 심해 병원에 가서 루프를 뺐지. 그라고 남편도 바로 거기서 수술했지예.”

부부의 원가족이 모두 8남매로 더 이상 자녀에 대한 욕심이 없을 만도 하지만,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하면 손해만 본다는 자조 섞인 경험담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현재의 출산장려 정책에 따라 태어난 세대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이다.

◇노년시기= 이 이야기만큼은 본인이 직접 하겠다고 말문을 연 문말순씨는 2000년에 유방암 진단을 받고, 8년 뒤 피부암으로 전이되는 고통을 겪었다. 그때 적극적인 항암치료와 긍정적 심리를 통해 극복했다고 한다. 실제로 남편 ‘덕수씨’가 손수 지은 고택 마루 벽에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찍은 7년 전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가족과 함께한 인고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사진을 보면서 ‘말순씨’도 ‘덕수씨’도 나도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문말순씨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녀를 당당하게 만든 작지만 큰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 인터뷰 직전에 치른 대한노인회 창원지회 주최 실버 가요제에서 우수상을 받은 것이다.

“노래를 진짜 좋아하거든. 잘해서가 아니라. 어제도 이게 자꾸 해라 싸. 내 좋아하지 잘하는 건 아이고, 좋아한다 그라니께 노인당에서 그래도 해라고.(웃음) 다른 지역에서 와 갖고 인자 스물일곱 명이 노래했거든.”

문말순씨는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인터뷰 요청에 응한 것도 모두 그녀의 결정이었고, 주위에서 추천하는 상급학교 진학 과정도 본인이 원하면 밟겠지만, 지금 배우고 있는 댄스스포츠가 더 즐겁다면 그쪽으로 정진해도 좋으리라.

“집에 있으면 웃을 일도 없거든. 둘이 있으면서 웃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꺼? 밸로 웃기지도 않는데.(웃음)”

인터뷰를 통해 채록한 어떤 사실보다 문말순씨가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인생을 풀어내기 시작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많은 해방둥이 여성들이 제2, 제3의 ‘말순씨’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글: 권현주 역사․여성․미래 구술사업 특별위원

[사단법인 역사․여성․미래 구술사업 특별위원회]

△장숙경 특별위원회 위원장 △강영경 공동대표 △권순형 교육문화위원회 위원 △이현주 교육문화위원회 위원 △권현주 특별위원회 위원

후원: 여성가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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