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의 경영학] 호암 ‘사업보국’ 밑거름… 이건희 ‘혁신’으로 ‘초일류 삼성’

입력 2015-02-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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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창업주 “기업육성이 곧 애국” 기간산업 육성… 이건희 회장, 휴대폰·반도체 등 글로벌 1위에

▲故 이병철 창업주(왼쪽)와 이건희 회장.

1953년 휴전 이후 한국 사회의 가장 큰 고민은 먹고 사는 것이었다. 6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이 일군 경제성장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한국 경제를 얘기하면서 삼성과 호암 이병철 창업주를 빼놓을 수 없다. 호암은 1936년 일본 도쿄 와세다 대학에서의 유학을 청산하고 경남 마산에서 방앗간을 열었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호암은 쌀장사로 돈을 벌자 운수업과 부동산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1938년 현재 삼성그룹의 전신인 삼성상회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해방 후 1948년엔 서울로 터전을 옮겨 ‘삼성물산’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1954년 호암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곳곳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국민들이 배불리 먹고, 제대로 입을 수 있도록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공장을 세웠다. 기업 경영을 통해 국가에 보탬이 되게 한다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신념이 바탕이 됐다.

호암은 생전 “사업보국의 정신이야말로 삼성의 정신이며 긍지”라고 누차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호암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면 그가 얼마만큼 사업보국을 강조했는지 알 수 있다. 기업 성장에 혼신의 힘을 다한 것이 바로 사업보국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호암은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기간산업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통해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자 호암의 이름은 기업인들은 물론 국민들 입에도 자주 오르내렸다. 어른들은 용돈을 헤프게 쓰는 아이들에게 “네가 이병철 아들인줄 아느냐?”며 꾸짖을 정도였다.

호암은 1957년 한국흥업은행, 조흥은행 주식을 사들였다. 이로써 시중은행 절반을 소유한 호암은 호남비료, 한국타이어, 삼척시멘트 등의 지분을 확보해 기간산업 발전에 힘썼다. 호암이 한국 제일의 기업가로 불린 것이 이때부터다.

그러나 호암의 일생은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호암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부정축재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추진하던 사업이 백지화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호암은 그때마다 꿋꿋이 사업보국만을 생각했다.

1979년 일흔이 되는 해 호암은 셋째 아들 이건희 당시 해외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임명했다. 호암의 사업보국 정신을 이을 후계자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해외사업추진위원회는 해외건설, 플랜트 수출, 합작 등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핵심 계열사 사장을 비롯한 수뇌부로 구성됐다.

호암은 무엇보다 이건희 회장의 됨됨이를 높이 평가했다. 이 회장은 자리에 앉아서 나이 많은 사장들을 불러대는 일이 없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아무에게나 물어봤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1987년 12월 1일 이 회장은 46세의 젊은 나이에 국내 최고 그룹인 삼성의 수장으로 추대됐다. 이 회장은 호암과 비슷한 모습이 많은 것으로 회자된다. 그 중 추진력과 집념, 일에 대한 고집은 아버지를 넘어설 정도라는 평가다. 관심 분야에 대해 끊임없이 파고드는 습관은 그를 전문가에 준하는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이 회장은 경영에 있어 동물적인 감각을 보였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삼성그룹은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이 회장은 그해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각각 나뉘어 있던 가전, 반도체, 휴대폰 계열사를 삼성전자의 한 지붕 아래 들이는 등 사업 구조를 뜯어 고쳤다. 이 회장이 삼성의 지휘봉을 잡은 지 4개월도 안된 시점이었다. 1977년 삼성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이후 10년간 경영수업을 받으며 초일류 삼성 도약의 해법을 차근차근 마련한 것이다.

‘포스트 이병철’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이 회장은 세계 1등 기업을 만들기 위한 자신만의 ‘플랜’을 하나씩 실행에 옮겼다. 이 회장은 평소 말을 아꼈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화두를 던졌다. 이 회장의 한 마디는 그 자체로 돌파구가 됐고, 삼성의 도전과 혁신의 동력이 됐다.

1993년 6월 7일 이 회장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대표적이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21년 전 이 회장이 작심한 듯 내뱉은 이 말은 삼성의 혁신과 성장에 버팀목이 됐다.

이 회장은 사장단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상생’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력사, 경쟁사 가릴 것 없이 모두와 협력해 함께 멀리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회장의 이러한 의지는 1996년 밝힌 신년사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회장은 당시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기업도 사회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했다.

이 회장은 작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현재 서울삼성병원에 입원 치료 중이다. 이 회장의 건강 상태는 많이 호전됐으나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이 회장 곁은 부인 홍라희 여사와 재용·부진·서현 삼남매가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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