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의 키워드] 희랍인 카잔차키스가 해준 말-“슬픔이 가벼워진다. 울지도, 소리치지도 마라”

입력 2017-03-1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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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요 며칠, ‘희랍인 조르바’를 쓴 그리스의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를 생각하며 지냈다. 그의 글 몇 줄이 요즘 우리나라 풍경과 그것 뒤에 숨은 우리들의 감정과 겹쳐서이다.

<옛날에 어느 이슬람 나라 토후(土侯)가 아끼던 사람이 전쟁에 나가서 죽었을 때, 토후는 부족 사람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어요. “그랬다가는 너희들의 슬픔이 가벼워질지 모르니까, 울거나 소리를 지르지 마라!”>

그의 회고록 ‘영혼의 자서전’에서 내 눈길을 오래 잡은 구절이다. 슬픔은 울어서 덜어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깊이 간직해야 할 슬픔도 있다는 걸 이 구절을 보고 알았다.

대통령 탄핵을, 탄핵된 대통령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다. 참아야 할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면 그 슬픔을 오래오래 간직해야 한다. 울고 소리치면 슬픔이 가벼워져, 종내에는 모두 휘발된다. 이 구절 바로 뒤는 “슬픔을 참는 그런 행위는 인간이 스스로 짊어지는 가장 자랑스러운 수련이에요”이다. 늙거나 젊거나 우리에게는 그런 수련이 더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탄핵을 반기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웃음을 참아야 한다. 웃음은 어렵게 찾아온 기쁨을 가볍게 해 오래가지 못하도록 할 수 있다. 숨어서 울고, 숨어서 웃어라. 그렇게 하지 못하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냄비처럼 쉽게 끓고 쉽게 식을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이런 담대한 처변불경(處變不驚, 어떤 처지에서도 놀라지 않는다)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어느 해 폭우로 그해 포도 농사를 다 망쳤다. 다른 사람들은 망연자실(茫然自失), 하늘을 원망하거나, 통곡하고 있었다.

<“아버지!” 내가 소리쳤다. “포도가 다 없어졌어요!” “시끄럽다.” 아버지가 대답했다. “우리들은 없어지지 않았어.”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순간이 내가 인간으로서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위대한 교훈 노릇을 했다고 믿는다. 나는 욕이나 애원도 하지 않고 울지도 않으면서, 문간에 꼼짝 않고 침착하게 서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항상 기억했다. 꼼짝 않고 서서 재난을 지켜보며,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 혼자만이 인간의 위엄을 그대로 지켰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아 있다. 지나간 것, 되담을 수 없는 것, 되담을 수 있다고 해도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남아 있는 우리는 새로운 것, 새로운 기회를 찾는 것이 옳다.

카잔차키스는 작품에 그리스의 아버지들이 아들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많이 남겼다. 소설 ‘미할리스 대장’의 미할리스는 그의 아버지이다. 이 소설에 미할리스의 형이 아들을 동생에게 맡기면서 “자네 좋을 대로 하게. 그놈 뼈는 내 것이되 살은 자네 것이니 두들기고 다듬어 사내나 만들어 놓게”라는 대목이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감정 과잉-슬픔이나 기쁨을 지나치게 표시하는 것과, ‘추억 만들기’, ‘힐링하기’ 따위의 개념과 행동에서 나타나는-은 두들기고 다듬어 만들어진 사내들이 자꾸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스의 어머니들은 어땠나. 그리스가 오토만 터키의 침략을 당한 1803년, 에피루스(Epirus) 지역의 잘론고 절벽에서 그리스 여인 57명이 차례로 뛰어내려 숨졌다. 쳐들어오는 터키 군인들에게 붙잡혀 노예가 되기보다 죽음을 택했다. 그들은 아기들을 절벽 아래로 던진 다음, 원을 이뤄 춤추고 노래하면서 한 명씩 아기들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춤과 노래는 ‘잘론고의 댄스’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

카잔차키스는 이런 아버지들과 어머니들로부터 보고 들으며 ‘애국심’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동족을 백안시(白眼視)하는 글은 못 봤다. 카잔차키스는 한국인들에게 아직도 낯설다. 우리는 우리끼리 증오하고 적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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