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말] 교황이 떠난 자리

입력 2014-08-19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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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1891년 당시 교황 레오 13세는 가톨릭 주교들에게 회칙(回勅·encyclical letter), 즉 내부 서신 하나를 보냈다. ‘레룸 노바룸(rerum novarum’, 우리말로 ‘새로운 변화에 대하여(of the revolutionary change)’라는 제목의 회칙이었다.

회칙에서 교황은 시장경제와 사유재산 제도의 비정함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비정함 속에서 점점 더 궁핍해지고 있는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교황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도에 내재된 비정함을 완화할 수 있을까? 일부의 주장처럼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제도 그 자체를 부정할 것인가? 아니었다. 교황에 있어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신의 뜻이었다.

그의 답은 오히려 공동체와 국가, 특히 공동체의 교정기능에 있었다. 누구든 돈을 벌되 필요 이상의 부는 공공선과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했다. 또 국가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해야 하며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고 했다.

12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통해 가톨릭의 진보적 정신을 다시 들었다. ‘시장경제와 자유주의 정신을 존중하되 그것이 불러올 수 있는 비정함을 경계해야 하며, 공공선을 향한 우리 모두의 공동체적 노력으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표현은 레오 13세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했다. “물질주의의 유혹과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라.” 싸우라? 일부 언론의 지적처럼 교황의 말씀 같지 않게 느껴질 만큼 강하다. 바티칸 출입기자들도 이례적으로 강한 표현이라 했다고 한다.

또 있다.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 경제 모델을 거부하라.” 역시 강하다. 문맥 그 자체만 보면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비난하는 진보정치인들의 정치적 구호를 듣는 것 같다.

무엇이 교황으로 하여금 이렇게 강한 표현을 쓰게 했을까?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최하위의 행복지수, 그리고 안전사고로 수백 명의 어린 생명들이 희생되는 나라, 교황이 말하는 바로 그 ‘죽음의 문화’가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무례한 일이 되겠지만 교황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한 번 보자. 사회비 지출은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합쳐 국내총생산의 12% 남짓 된다. OECD 국가 평균인 25%의 절반 수준이자, 35% 안팎에 이르는 스웨덴과 프랑스 등의 3분의 1 수준이다. 그만큼 시장의 비정함을 교정하기가 어려운 형편이라는 뜻이다.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다. OECD 국가 최장의 노동시간에 공동체와 공공선을 고민할 시간도, 또 사회봉사를 위해 나설 시간도 없다. 기부문화 역시 마찬가지, 돈을 쉽게 내어 놓을 수가 없다. 사회안전망과 금융구조가 취약한 상황에 있어 언제 다시 필요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쌓고 또 쌓아도 불안한 상황이다.

반면 시장의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 비정함 역시 점점 더 심각한 양상을 띤다. 국가는 시장에서의 승자에 의해 포획되어 있고, 교회마저 그들이 쌓은 돈을 축복하며 그들의 돈으로 궁궐 같은 성전을 짓고 있다.

전 국민이 교황을 연호하는 순간에도 세상은 언제나처럼 돌아갔다. 국회는 세월호특별법을 두고 싸움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고, 정부는 시장을 살린다는 명분 아래 부동산 대책 등 시장의 비정함을 더할 정책들을 쏟아 놓았다. 연금도 낮은 국민연금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외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공적 연금을 다시 더 깎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교황은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교황이 떠난 뒤 고개는 다시 무거워진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국가와 교회마저 포획된 마당에 누가 이 싸움을 이끌 것인가? 이순신은 12척의 배라도 있었는데, ‘죽음의 문화’와 싸울 사람들은 과연 몇 척의 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길은 하나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교황이 떠난 자리, 그와 함께 심은 희망의 씨가 자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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