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사장단, 이건희 회장의 화법 해독 '고심'

입력 2006-06-01 10:30 수정 2006-06-0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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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침묵후 꺼낸 '마하론' '골프론' 의중은 뭔가

"비행기가 음속의 세배 속도로 날려면 엔진뿐만 아니라 날개 재질 등 모든 부분이 바뀌어야 한다."

"골프에서 핸디를 줄이려면 드라이버 아이언 퍼터 등 전 부문의 기량이 모두 향상돼야 한다."

지난 3월말과 5월초 영빈관 승지원에서 전자계열사와 금융 계열사 사장단 회의가 열린 자리에서 이건희 회장이 사장단에게 건넨 화두다.

각 계열사의 경영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 뜬금없이 소위 '마하론'과 '골프론'이 언급되자 사장단은 이 회장의 숨은 진의가 무엇인지 몰라 무척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삼성그룹 사장단은 현재 이건희 회장의 화법을 해석하느라 여념이 없다. 장기간의 해외외유 끝에 이 회장이 봇물 터지듯이 새로운 아젠다(agenda)를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이 달에 이 회장과 승지원에서 저녁식사겸 회의를 가질 있을 예정인 삼성물산, 제일모직 등의 CEO들은 '이건희'식 화법에 대한 공부에 여념이 없는 것으로 알져졌다.

◆ 이 회장, 오랫동안 침묵하다 말 한마디 '툭'

대그룹 사장이 총수의 화법을 이해하기 힘들어 공부한다는 것은 언뜻 보면 쉽게 이해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회장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거나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라면 뜻밖에 이 회장의 말이 어눌하고 투박하게 들리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안광이 강한 '호(虎)'상과는 다르게 느릿한 말투에 경상도 사투리까지 섞여 있고 문장이 길게 늘어질 때가 많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끝맺는 말이 어디인지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종지(終止)형이 불분명할 때가 많고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을 하기도 한다. 계속 말을 이어갈 때도 어디서 끝나는지 도통 짐작하기 힘들 때가 많다.

이 회장이 사전에 깊은 사고를 통해 결론을 내린 후 하는 말이기 때문에 처음 듣는 사람은 더욱 황당할 수 있다. 사장단 회의에서 언급했던 '마하론'과 '골프론'의 진의가 '임직원 모두가 총체적인 혁신이 필요하다'는 이 회장의 주문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는 후문이다.

때문에 이 회장이 불쑥 던지는 질문에 대해 계열사 사장들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이 회장이 은유와 비유를 능수 능란하게 쓰기도 하지만 한 가지 주제를 정하면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는 특이한 질문방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통해 대답자의 진을 빼놓기도 한다.

◆"이 호수에 반도체 공장을 몇개나 지을수 있나?"

언젠가 이 회장이 유럽으로 반도체 공장 부지를 시찰하러 비행기를 탑승했을 때였다. 때 마침 비행기는 바이칼호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이 회장은 당시 반도체 부문 사장을 불러다 놓고 "이게 뭐코?"라고 질문을 던졌고 해당 사장은 "바이칼호입니다"라고 바로 답변을 했다.

그러자 곧, "이게 크기가 얼마나 되지?", "3만1500㎢입니다.", "그럼 여의도의 몇 배나 되지?", "여의도 면적 840만㎡정도 되니까, 대략 45배정도 됩니다."식의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사장은 이 회장이 어떤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진의를 파악하면서 이 회장의 계속되는 질문에 대답을 하느라 바짝 긴장을 해야만 했다.

'도대체 회장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칠 때쯤, "그럼 우리가 지금 보러 가는 반도체 공장 부지는 이 바이칼 호에 몇 개나 지울 수 있지"라는 이 회장의 질문을 듣자 비로소 이 회장의 숨은 뜻을 간파할 수 있었다.

즉 이 회장은 바이칼 호가 실제로 몇 만평이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사장이 반도체 공장부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수치를 일반적으로 견주어 볼 수 있는 실체와 견주어 얘기할 수 있는지를 물어 본 것이었다.

이 회장이 원했던 답은 "바이칼 호는 여의도의 47배정도 되고 우리가 지금 짓고자 하는 반도체 공장 부지를 몇 개나 지을 수 있는 크기입니다"라는 답변을 원했던 것이다.

이미 이 회장은 다 알 고 있는 사실들이지만 해외를 진출하는데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를 하라는 뜻과 함께 점검하려는 의도가 강했던 질문이다. 답변이 나올 때가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했던 것이고 만약 끝까지 원하는 답변이 나오지 못했을 경우 불호령이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이러한 답변을 제때에 간파해 대답을 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해외에 법인을 세우거나 공장부지를 건립할 때 이 회장은 해당 나라와 지역의 기후, 풍토, 습관, 문화 등 일반적으로 사업과 도통 관련이 없다라고 생각되는 것까지 해당 사장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하게 공부하지 않고 가면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이건희식의 화법 때문에 회의나 사업보고 등과 같이 이 회장과 접견할 일이 생기는 사장들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료만 해도 전화번호부의 두께를 넘어설 때가 흔하다. 이렇게 준비해 가도 이 회장의 질문에 답변을 못할 때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 진대제, 황창규 사장, 이 회장의 질문 가장 잘 대응

이처럼 이건희 회장의 속사포식 질문에 가장 잘 대응했던 사장으로 진대제 전 삼성전자 디지털 미디어 사장과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사장을 들 수 있다.

진 전 사장은 미국의 IBM에서 활동하다 이 회장이 직접 관리하는 S급 인재로 선택돼 삼성전자로 합류한 그야말로 그룹내에서 앨리트 중에 앨리트였다.

하지만 진 전 사장도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한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할 때에는 모의 프리젠테이션을 두번이나 반복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임원들을 모아놓고 가상 질문까지도 받고 이에 답하는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회의처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이건희 회장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90%정도 소화해 낼 수 있었고, 이 회장의 심중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 회장은 진 전 사장의 프리젠테이션을 흡족했었다고 한다.

황창규 반도체부문 사장도 이 회장의 심중을 읽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회장의 빈소에 이건희 회장이 저녁 8시에 조문하러 온다는 소식이 일려지자 그룹 구조본 직원들이 6시부터 가서 준비를 했다.

그 때 황창규 사장도 관련 지인과 연관이 있어 빈소에 조문을 하고 가려던 차였다. 그런데 이 회장의 온다는 말만 듣고 4~5시간 이상을 기다린 것이다.

문상이 끝난 후 이 회장이 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렸던 황 사장은 그저 간단한 인사만을 한 후 이 회장을 보냈다.

몇년전 이 회장은 연말 삼성그룹 사장단 송년 모임에서 불쑥 "다른 사장들은 황창규 사장이 거래선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라"라고 언급, 참석자들을 긴장시킨 일이 있었다.

이 회장은 평소 특정인의 이름을 거론하며 칭찬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신임은 황 사장의 평소 이러한 숨은 노력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회장은 그리 달변가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회장의 한마디는 삼성에선 절대적인 '어명'과도 같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화법은 한마디로 이건희식 카리스마로 대변된다"고 말한다.

오너가 갖는 아우라(aura)라도 무시 못하지만 유난히 긴 침묵과 묵상 속에서 터뜨린 말 한 마디가 백 마디의 질책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는 태평로 삼성본관의 집무실에 있기보다는 저택에서 다독(多讀)과 다상량(多商量)을 통해 필요하다 생각할 때 직관적으로 세상으로 나와 화두를 던진다. 장기간에 응축된 걸 한꺼번에 터뜨리다 보니 다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회장의 말이 어눌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까닭은 그가 침묵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며, 말이란 일정한 침묵이 배경이 되어야만 가치가 드러남을 일찍부터 체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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