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의 말] 불완전한 광복

입력 2013-08-2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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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자주 가는 칼국숫집이 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이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맡던 1933년부터 1947년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될 때까지 약 15년을 살던 집에 자리 잡고 있다. 맛도 좋고 인심도 좋지만 선생이 살았던 집이란 역사성이 있어 더 자주 간다.

20평 정도의 작고 낡은 집. 선생의 인생을 막걸리 잔에 담아 보는 것도 괜찮고, 선생이 살던 시대에 비친 오늘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몇 잔 더 들어가면 이내 나오는 한숨.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선생이 살던 집, 이 역사적인 장소를 소방도로 건설이라 하여 반을 날려 버리고, 그나마 남은 반쪽도 칼국숫집이라. 한심한 민족사,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선생이 누구시던가? 스무 살 갓 넘은 나이에 국채보상운동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상하이임시정부 외교부 차장과 의정원 의장을 거치는 등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무장투쟁을 위해 군을 양성하기도 했고,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에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기도 했다. 옥고 등 갖은 고초를 다 겪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선생이 독립된 지 60년이 지난 2005년에야 건국훈장 추서를 받았다. 그전까지는 오히려 민족사의 죄인이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이어 좌익성향의 정당을 세우고, 온건 좌파의 입장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 좌우합작의 남북공동정부 수립을 주장한 죄였다. 온건이건 뭐건 ‘빨갱이’는 ‘빨갱이’, 독립을 위한 공은 인정될 수 없었다.

이런 경우가 어디 선생 한 분뿐이었겠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또 국가권력을 부정한 아나키스트였다는 이유로 그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테러리스트’란 오명을 쓴 채 남과 북 모두에서 거부되어 그 흔적조차 남기기 어려웠다.

반면 일제에 협력한 관료와 기업인들은 대거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냉전 구도 속에서 오로지 좌우 대립만을 생각했던 미군정이나 그 이후의 정부로서는 이들의 친일 전력이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좌익만 아니면 그만이었고 국가 운영에 필요한 능력과 기술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우리 현대사의 원죄. 그렇다. 정의로웠던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한 죄, 그리고 정의롭지 못했던 자들이 도리어 권세를 누리게 한 죄, 이것은 우리 현대사의 원죄다. 이 원죄로 인해 우리는 정의롭게 살 이유를 잃었고, 정의롭게 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진정한 광복은 이 원죄를 벗어나는 데 있다.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있다. 우리 스스로 정의를 세우지 않고 어떻게 일본에 정의를 요구하고, 그들의 정의롭지 못했던 역사를 나무랄 수 있겠나. 이 점에 있어 우리는 아직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다.

좌우를 따지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민족적 가치는 그 나름대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본주의와 군국주의가 뒤섞인 당시의 일본을 보며 이 모두를 부정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한둘이었겠나. 이들을 모두 해방 이후 채택한 이념의 잣대로 단죄한다면 누가 다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나서겠나.

지난주, 8월 15일 광복절 아침. 다시 일본을 생각해 보았다. 위안부 문제에 야스쿠니 신사 문제 등 도무지 반성할 기미가 없는 일본. 오히려 평화헌법 개정과 재무장을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계속되는 군비 증강에 군사력도 이미 우리를 넘어서고 있다. 문제는 다시 중국. 이에 질세라 중국 역시 군비 증강을 계속하고 있다. 주변 형세가 민족적 가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 우리는 얼마나 잘하고 있을까? 얼마 전 그 칼국숫집 주인에게 말했다. “몽양 선생의 글씨라도 영인해서 하나 걸어두지 그러세요.” 주인이 바로 받아 말했다. “말도 마세요. TV에 나간 것만 해도 혼이 났습니다. 빨갱이 살던 집이라며 돌을 던지고… 빨갱이가 독립투사는 무슨 독립투사냐는 거지요. 소문 안 나는 게 좋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우리 역사가 아직 여기밖에 못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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