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떠나는 여행, 혹은 떠나지 않는 여행- 강헌 음악평론가

입력 2013-08-0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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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CEO’ 하면 동반하는 이미지는 이른바 007 가방을 들고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역동적인 동선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름 휴가도 없이 서류 더미에 신음하거나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시간도 잊고 동분서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CEO의 정의가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회사를 나서는 존재라고 한다면 이들에게 여행은 은퇴나 해고 후의 계획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행은 인간이 지닌 상상력의 원천이다. 예술가들은 여행을 통해 우리 모두가 삶의 나그네임을 일깨워준다. 특히 낭만주의의 아들들이 그랬다. 멘델스존의 3번 교향곡 ‘스코티시’나 4번 교향곡 ‘이탈리아’가 음악적 풍경의 축제라면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여행’은 모든 것을 상실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이 가장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사색의 행로일 것이다.

꼭 어디론가를 떠나야만 여행은 아니다. 보들레르는 책 읽는 것을 ‘떠나지 않는 여행’이라고도 했다. 훌륭한 작품들은, 그것이 시건 소설이건 음악이건 그림이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일상에서 탈주하게 해 준다.

여름이면 우리는 마치 그러기로 약속한 사람들처럼 바다로 계곡으로 몰려간다. 그곳엔 물이 있기 때문이다. 물은 인간에게 태초의 근원이자 향수이며, 가장 가라앉은 상태의 휴식이고, 무엇보다도 생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음악은 물의 속성을 닮았다. 흘러가는 선율, 넘실대는 리듬,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하나로 만드는 화성,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음색, 눈앞에 실재하는 것이면서도 정작 손에 쥐면 빠져나가는 것까지 음악은 물을 쫓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 물로 발효시킨 술처럼 우리는 서서히 그 속에 도취되어 가는 것이다.

물에는 변화무쌍한 표정이 있다. 평화와 유희가 있는가 하면 분노와 위기가 있고 슬픔과 회한이 아련하게 스며든다.

신이 물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 이 말은 와인광들이 좋아하는 와인 예찬의 아포리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후줄근한 여름, 물을 찾아가지 못한다면 식구들 혹은 동료들 아니면 그냥 오랜만에 만난 옛 벗들과 와인 한 병을 따는 것이 좋겠다.

이상하게 한국에선 화이트 와인이 인기가 없다. 와인 하면 으레 레드 와인을 떠올린다. 알코올 도수가 낮아서 술이 아니라 음료 같다는 비아냥도 있지만 적절히 차게 식힌 화이트 와인 한 잔은 예리하게 세공된 보석의 광채처럼 장마와 무더위에 지친 혀와 두뇌를 순식간에 일깨워줄지 모른다.

화이트의 로마네 꽁티라는 몽라셰는 분명 사치다. 도멘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몽라셰 그랑 크뤼는 한 병에 백만원이 훌쩍 넘고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떠날 수도 없고 책도 읽기 힘들고 음악조차 들을 여유가 없을 만큼 지쳤을 때 이런 의외의 사치는 의외의 신선한 충격이 될지도 모르겠다.

6년 전 여름 지인의 집에서 마신 몽라셰가 생각난다. 나는 그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독한 무기력 상태였다. 첫 모금을 들이킨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마치 내 혀 위로 수정으로 만든 입체적인 구조물이 세워지는 것 같았다. 연이어 땄던 퓔리니 몽라셰 프르미어 크뤼도 훌륭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인간의 시간이다.

루이 파스퇴르는 “한 병의 와인에는 세상의 어떤 책보다도 더 많은 철학이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인다운 과장이지만 왠지 몽라셰 앞에선 고개를 끄덕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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