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은퇴 후 30년' 준비하기

입력 2012-03-13 09:14 수정 2012-03-1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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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용 SK텔레콤 고문

퇴직을 했다. 아는 사람이 문자를 보냈다. “ 섭섭하지 않으세요?”

잠시 생각하다 답장을 보냈다. “신입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상무보 상무 전무 부사장 사장 고문. 과분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답장이 왔다. “ 축하합니다.”

1980년에 회사원이 됐다. 32년 간의 회사 생활이었다. 가만 생각하니 회사에 몹쓸 짓을 많이 했다.

놀면서도 일하고 있다고 했다. 상공부로 공문 전달한다고 갔는데 사실은 장충체육관에 가서 농구 본 적도 있다.

모르면서도 안다고 했다. 외국 경제인 만나서 들리는 것은 없고 아는 대로 지껄이고는 그 나라 하고 제대로 협력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되지도 않는 일을 된다고 했다. 신문 기사가 고약하게 날 것 같은데 내일 아침에 별 일 없을 것 같다고 전화했다. 일이 터지면 밤새 터졌을 뿐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회사가 몰랐을 리가 없다. 알면서도 봐 줬을 것 같다. 퇴근 후에 술잔을 들면서 회사 일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다 보면 높은 분들은 대부분 미리 알고 있었다.

놀라웠다. 내가 높아져 보니 아랫사람의 얘기나 동정이 저절로 들여다 보였다.

그래도 32년간 회사는 꼬박꼬박 월급을 줬다. 회사에 험담을 하면서도 월급은 하늘이 준 권리인양 챙겼다. 그 돈으로 아이들 등록금 내고 생활비로 썼다. 지금 보면 나는 회사라는 부처님의 손바닥 위에서 마음껏 여의주를 휘둘렀던 손오공이었다.

임원이 되고 부터는 매년 인사철이면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 아래 사람을 불러 애기했다. “ 그 동안 수고 했다. 끝까지 같이 가야 하는데 같이 가지 못해 미안하다. 건강을 챙겨라. 좋은 모습으로 다시 만나자.” 이 네귀절이 전부였다. 그런데 퇴직할 때 내가 받은 인사도 이 네귀절 이었다.

내가 통보할 때는 내 맘을 알아주기를 바랬다.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피난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정도 밝기를 바랬다. 더 큰 바다에 가야 더 큰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응당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당사자들은 표정이 어두웠다. 회사 밖에 모르고 살았으니. 나는 그렇지 않은데.

이렇게 통보만 해 주고 살아왔는데 내가 통보를 받았다. 당연히 표정이 밝아야 했다. 일의 부담에서 벗어 났으니 홀가분해야 되고 더 큰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됐으니 즐거워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이제야 연말에 퇴직 통보를 받던 분들의 어두운 표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닌가. 그래도 30년은 더 살 테니 기회가 있겠지. 모자람이 있을 때는 채워줬고 잘못을 했을 때는 뒤집어 써 줬다. 주변의 선배, 후배, 동료들에게 진 빚을 갚기에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있다. 30년을 일했으니 30년은 봉사하련다.

퇴직하고 나니 이곳 저곳에서 전화가 많이 온다.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표현이 실감난다. 그런데 묘하다. 내가 많은 돈을 쓰고 시간을 들인 곳에서는 별로 전화가 없다. 전화와도 콜백도 안했던 영양가 없는 회사, 시간에 바빠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오랜 친구, 이런 곳에서 더 전화가 온다. 모두가 감사와 따뜻한 격려의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모셨던 갑(甲)들은 여전히 바쁘겠지. 수고했다는 전화를 기대 했던 건 내 과욕이었다.

퇴직하고 얼마 후 컨설팅을 하는 친구를 만났다. 인생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가려야 컨설팅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잘하는 일을 물었다. “ 회사가 시킨 일은 잘했지.” 그럼 네가 좋아하는 일은? “ 회사에 좋은 일은 참 좋아 했지.” 쓴 웃음을 짓더니 컨설팅 결과를 얘기 해줬다. “ 너 같은 회사족은 최소 1년은 머리를 비워야 인생을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회사가 인생 이었는데.

15년째 모닝 콜 시간은 4시 50분 이었다. 퇴직 통보를 받던 날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와 아내에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 핸드폰의 모닝콜을 해제했다. 퇴직 후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알람이 사라진 순간 홀가분 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되기 전에 일어나 시계를 본다. 왜 4시 50분이 되지 않지. 아직도 멀었네. 석달째 접어든 나의 퇴직 생활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권오용 SK텔레콤 고문 약력

△1955년생 △서울사대부고 졸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 △전국경제인연합회 기획홍보본부 본부장 △금호그룹 비서실 상무 △KTB네트워크 전무 △SK텔레콤 홍보실장 △SK그룹 브랜드관리부문부문장 △SK그룹 PR어드바이저 사장

/권오용 SK텔레콤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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