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행원 4인의 '좌충우돌' 분투기]학교앞에 '합격' 플래카드…"명문대 출신 부럽지 않아요"

입력 2012-02-13 15:10 수정 2012-02-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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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알고 거칠게 대하는 고객, 아직까지는 낯설다고 느껴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사회로 뛰어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들만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사진 왼쪽부터 김지혜 기업은행 계장, 권훈진 하나은행 행원, 김예원 국민은행 주임, 김지현 우리은행 주임.(사진=노진환 기자)
그들은 모이자 마자 웃음꽃을 피웠다. “졸업식은 언제에요? 참석할 거에요?”, “별단(수표 등 미정리된 보관금을 마감하는 일) 업무가 어려운데 어떤 식으로 하세요?”, “언니, 연수원 때 삼촌(연수 교육 팀장)들이 잘해줬어요?” 등 수다가 그치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마친 19~20살의 여성 넷이 모였으니 말이다. 이들에겐 공통 분모가 있다. 학력 사회란 짙은 그늘을 깨고 지난해 당당히 은행에 입사했다.

이들은 길게는 입사 1년, 적게는 100일이 막 지났다. 이제 시작이다. 그렇다고 포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 나이 답게 오히려 당찼다. ‘행장이 목표이다’라고 거침없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고졸이 보여주기식 채용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정년까지 은행에서 근무하겠다”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고졸 채용 바람이 이제 막 시작이라면 그 끝도 보란 듯이 가꾸고 싶다는 의미다.

지난해 은행에 입사한 권훈진 하나은행 계장(19, 입행 2011년 11월), 김예원 KB국민은행 주임(18, 입행 2011년 10월), 김지현 우리은행 주임(19, 입행 2011년 10월), 김지혜 기업은행 계장(20, 입행 2011년 1월)과 지난 7일 종로의 한 이탈리안 식당에서 두 시간 동안 수다를 떨어봤다.

-지난해부터 은행에서 고졸 행원을 뽑았다. 언론의 관심도 높은데, 시선이 부담스럽지는 않나?

▲김예원 주임= 주변에 보면은 ‘누가 인터뷰를 했다더라’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몇 십년 만에 처음이라니 이해는 간다. 최근 고졸 행원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와 신문도 꼼꼼히 챙겨보게 되더라.

▲김지혜 계장= 지난해 여름, 신문 1면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적이 있다. ‘고졸 행원 채용 바람 몰고왔다’란 기사였다. 인터넷 포털에서 댓글이 많이 달렸다. 외모를 겨냥한 인신공격성 댓글도 많아서 상처 받은 적이 있다.

-은행에서 고졸을 뽑겠다고 나선 건 지난해 3월쯤부터다. 이전에는 은행을 고려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은행원이 될 생각을 했나?

▲권훈진 계장= 누가 고졸을 행원으로 뽑나. 학교 다닐 때는 상상도 못했다. 여름까지는 수능을 준비했었다. 그러다 학교에서 추천서를 받을 기회가 주어졌다. 은행 연수원에 들어가서는 열심히 해서 1등으로 졸업했다. 학교에서는 합격 대자보를 달아주기도 했다.

▲김지현 주임= 고등학교 때 관광과여서 스튜어디스가 꿈이었다. 그런데 고2 때 선생님이 “너는 키가 작으니 다른일을 해보라”고 했다. 이후에 은행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김예원 주임= 금융권에 취직할려고 했지만 은행은 생각도 못 했다. 신용협동조합이나 새마을금고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해 3월에 터진(은행에서 고졸 행원을 뽑기 시작했다는 뜻) 뒤 은행을 생각했다.

김지현 주임은 이날 교복 차림이었다. 왼쪽 가슴에는 이름표가 붙어있는 채였다. 고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고 왔기 때문이다. 권훈진 계장과 김예원 주임도 지난 9일 졸업식을 치뤘다. 2012년이 이들에겐 학교와는 작별이고 사회인이자 은행원으로서의 첫 발을 디딘 해이다.

김지혜 계장은 다른 세 명의 행원보다 한 살이 많았다. 지난해 2월에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맏언니이자 선배인 김지혜 계장은 인터뷰 중간 중간에도 후배들의 조언 요청에 답해주는라 바빴다.

-막상 들어오고 나서 힘든 점은 없었나? 이른 나이에 취직해서 선배나 고객이 모두 낯설을 것 같은데.

▲권훈진 계장= 처음에는 혼나다 보니 ‘내가 고졸이라 그런가’란 생각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 정규직 오는거 보니 똑같이 혼나더라. 이보다는 어머니가 대학 등록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이를 덜어드려서 기뻤다.

▲김지혜 계장= 고졸이라고 해서 “넌 신경 쓸 필요 없다”며 열외로 칠 때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지난해에는 은행에서 예금유치를 6개월 동안 했는데 저는 알려주지도 않았다. 마감 3주를 남기고 악착같이 해서 전국 7등을 했다.

▲김지현 주임= 힘든 것 보다는 연수원 때 삼촌들이 너무 잘해주셨다. 딸 같다면서….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다시 연수원에 들어가는데 인사가 나서 삼촌들이 다른데로 이동해서 아쉽다.

-은행에 들어왔을 때 부모님도 기뻐하셨을 것 같은데, 첫 월급은 부모님께 드렸나?

▲김예원 주임= 이번 설날이 대박이었다. 부모님이 고졸이라고 주춤하지 않으시고 “우리 고졸 딸이 은행에 들어갔다”라며 자랑하셨다. 첫 달은 못 드리고 두번 째 때 드렸다.

▲김지현 주임= 첫 월급은 고등학교 때 밀린 실습비 메꾸는데 썼다. 메우고 나니 남는게 없어서 부노님께는 드리지 못했다.

▲권훈진 계장= 부장님이 돈 쓰지 말고 모으라고 했다. 직접 적금 만들어서 월급을 다 넣어주더라.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린 나이에 사회로 뛰어든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들만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왼쪽 위 시계방향으로 김예원 국민은행 주임, 김지현 우리은행 주임, 권훈진 하나은행 행원, 김지혜 기업은행 계장.(사진=노진환 기자)
-고졸 행원은 이제 시작이다.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에 서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목표가 있다면.

▲김예원 주임= 얼마 전에 은행 인턴으로 서울의 명문대 대학원생이 왔다. 그 사람을 보면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걸 보니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라고 생각했다. 학력을 떠나 은행은 신뢰가 제일 중요하다. 나를 보고 은행을 찾아오는 지점장을 해보고 싶다.

▲권훈진 계장= 평생 직장이고 싶다. 여기에서는 능력도 인정받고 싶고 많이 배우고 싶다. 아직까지 고졸 사무직 여성들은 사회에서 경쟁력이 많이 떨어진다. 은행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 지점도 여성 차장이 남자 차장보다 나이는 적지만 선배이기도 하다.

▲김지현 주임= 육아 휴직을 두 번 이상은 가야 하지 않겠나. 40세 이상 넘어서까지 은행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이다. 고졸 후배가 들어왔을 때 정말 잘 챙겨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 고졸 채용 바람이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면 한다.

▲김지혜 계장= 고객이 예금 만기를 찾아갈 때 “우리 손녀 교복하나 해줄려고 한다”, “아들 장가 가는데 보탤꺼다”라고 말할 때 뿌듯하다. 고객에게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닌 꿈을 주고 싶다. 은행에서 이룰 것 이루고, 거칠 건 다 거친 뒤 정년퇴임하고 싶다.

두 시간 동안의 수다는 자리를 파한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으면 “우리 정기적으로 모여요”라고 이들은 약속했다. 동료로서 멘토로서 서로의 힘을 북돋겠다는 것이다.

고졸 행원을 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정권의 압박에 못 이긴 보여주기식 채용이 아니었겠나, 오래 가지는 못할 거다’라고 말하는 이들과 ‘학력 사회의 새바람’이란 평가가 공존한다.

아직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대부분 은행의 고졸 행원은 정규직 전환이 가로막혀 있다. 2년 뒤 무기계약직로 전환되는 데 만족해야 한다. 고졸 행원 채용이 여성 위주로 이뤄지는 것도 문제다. 직군이 성별을 통해 고착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졸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연봉도 학력 사회의 남은 그늘이다.

이날 인터뷰를 마친 시간은 오후 9시였다. 그리고 약속했다. 10년 뒤 다시 모여서 인터뷰를 해보자고. 지난해 첫 걸음을 뗀 고졸 채용이 어디까지 진화해 있을지,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10년 뒤 다시 한 번 되집어 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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