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이 AI 데이터센터 확산과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에 힘입어 향후 10년간 2.6배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중국 기업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을 주도하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공급망 규제가 강화되면서 국내 기업에도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단순한 배터리 제조 경쟁에서 벗어나 현지 생산거점 확보와 안전 인증, 시스템 운영 역량을 갖추는 것이 시장 선점의 핵심 과제로 꼽힌다.
삼정KPMG는 2일 발간한 '커지는 ESS 시장, 달라지는 경쟁력의 기준'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ESS 산업의 성장 전망과 국내 기업의 대응 전략을 제시했다. 보고서는 ESS 산업의 경쟁력이 배터리 가격과 생산원가 중심에서 공급망 적격성, 안전성, 시스템 통합 및 운영 역량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글로벌 ESS 신규 설치량은 지난해 112GW로 전년 대비 48% 증가했다. 연간 설치량이 100GW를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특히 연간 설치 규모가 10GW에서 100GW로 확대되는 데 불과 4년이 걸리면서 태양광과 풍력보다 빠른 보급 속도를 나타냈다.
시장 성장세는 향후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글로벌 ESS 시장 규모는 2025년 548GWh에서 2035년 1447GWh로 약 2.6배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용도별로는 전력망용 ESS가 2035년 전체 시장의 약 67%를 차지하며 최대 수요처 지위를 유지할 것으로 관측된다.
ESS 시장 확대의 주요 배경으로는 전력망의 구조적 한계가 꼽힌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설비가 늘어나더라도 송배전망 구축과 계통 연결이 지연되면 생산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어렵다. 발전량이 전력망 수용능력을 초과할 경우 발전을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출력제어도 발생한다.
ESS는 전력 수요가 적은 시간대에 생산된 전력을 저장했다가 수요가 집중되는 시간대에 공급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발전설비 증설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전력 수급 불균형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전력망 투자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확산도 새로운 성장 동력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가 2030년까지 2025년 대비 약 두 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AI 데이터센터는 일반적인 전력 수요 증가뿐 아니라 고밀도 전력 사용과 급격한 부하 변동에 대응해야 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 체계가 필수적이다.
시장이 확대되는 가운데 글로벌 경쟁 구도는 중국 기업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올해 1분기 기준 중국계 기업의 ESS 시장점유율은 83.6%에 달했다. 중국 CATL은 29.8%의 점유율로 선두를 유지했다. 중국 업체들은 대규모 생산설비와 원가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에서 높은 영향력을 확보한 상태다. 그러나, 미국과 EU가 보조금 지급 조건과 원산지 관련 규제를 강화하면서 가격 경쟁력만으로 시장을 공략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배터리 생산지역과 핵심 소재 조달 경로, 공급망의 적격성 등이 프로젝트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국내 배터리 기업에 기회이자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중국산 제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수요가 확대될 경우 한국 기업의 공급망 경쟁력이 부각될 수 있다. 반면 현지 생산시설 구축과 원재료 조달망 다변화에는 상당한 투자비용이 수반된다. 생산거점 확보에 그치지 않고 원산지와 탄소발자국, 배터리 여권 등 규제 대응에 필요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기술 경쟁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ESS용 배터리는 전기차용과 달리 에너지밀도보다 수명과 안전성, 단위 저장용량당 원가가 중요하다.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력이 높고 열적 안정성이 우수한 리튬·인산·철(LFP) 배터리가 시장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신규 ESS 설치량의 93%가 LFP 배터리로 구성될 정도다.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기존 삼원계 배터리 중심의 기술 경쟁력을 ESS 시장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이 과제로 꼽힌다. LFP 배터리의 원가와 성능을 개선하는 동시에 나트륨이온배터리(SIB) 등 차세대 기술에 대한 대응도 병행해야 한다. 특히 대규모 ESS 설비는 장기간 운영되는 특성상 배터리의 열관리와 화재 예방, 안전 인증 확보가 사업 경쟁력과 직결된다.
배터리 셀을 넘어 시스템 전체를 공급하고 운영하는 역량도 중요해지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력변환시스템(PCS), 냉각설비, 에너지관리시스템(EMS) 등 배터리 외 구성요소가 배터리 시스템 원가의 53%를 차지한다. 배터리 제조만으로는 ESS 산업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특히 ESS는 설치 이후에도 충전과 방전 시점을 조절하고 전력시장 가격과 수요를 분석하는 운영 기술이 필요하다. 동일한 배터리 용량을 확보하더라도 운영 소프트웨어와 에너지관리 역량에 따라 설비 활용도와 경제성이 달라질 수 있다. 이에 따라 시스템 통합(SI), 운영·유지보수(O&M), 전력시장 연계 서비스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셀 공급에 집중하는 기존 사업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분석도 이와 맞닿아 있다. ESS 프로젝트는 배터리뿐 아니라 전력변환장치와 냉각설비, 제어 소프트웨어 등이 결합된 형태로 구축된다. 시스템 전체의 성능과 안정성을 책임지는 역량을 확보할수록 단순 부품 공급업체와 차별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삼정KPMG는 국내 기업의 대응 과제로 △판매시장별 적격 생산거점 및 공급망 구축 △LFP 중심의 기술 경쟁력과 열관리·안전 인증 역량 강화 △시스템 통합 및 운영 소프트웨어 역량 확보 등 세 가지를 제시했다. 정양기 삼정KPMG 전무는 "ESS 산업의 경쟁력은 더 이상 배터리 가격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며 "공급망 적격성은 시장 진입의 조건이 되고, 안전·인증과 시스템 운영 역량은 기업의 수익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