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리학이 오래전에 확인한 것이 있다. 취향은 유전적으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통과하며 자란다. 스스로 시도해 볼 수 있는 자율성, 그 시도가 실패해도 안전하게 조정할 수 있는 관계, 그리고 반복 속에서 자기 효능감이 쌓이는 시간. 이 세 조건이 갖춰진 환경에서 개인의 취향은 서서히 자기 형태를 갖는다. 알고리즘 환경은 이 조건 중 첫 번째를 조용히 대체해 왔다. 나 대신 무엇이 나에게 어울릴지 시스템이 결정해 주기 시작하면서, 자기 취향을 시도하고 점검하는 자율성의 근육이 쓸 자리를 잃었다.
여기서 취향에 대한 통념 하나를 다시 물어야 한다. 취향은 어떤 콘텐츠를 좋아하는지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가 감성 영화를 좋아하는가는 표층의 결과일 뿐이다. 그 아래 층위에 훨씬 안정적인 개인차가 있다. 어떤 대상을 만날 때 분석하며 몰입하는가, 아니면 그대로 수용하며 몰입하는가. 세부에 집중해 파고드는 방식으로 즐기는가, 전체 분위기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즐기는가. 이 처리 양식은 관심 대상이 재즈에서 산책으로, 등산에서 잠수로 옮겨가더라도 그대로 유지된다. 분석하며 몰입하는 사람은 계속 분석 모드로 진입하고, 수용하며 몰입하는 사람은 계속 수용 모드로 진입한다.
이 층위에서 자기 이해가 생기면 한 가지 결정적 변화가 일어난다. 사용자는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개별 목록 앞에서 ‘이 대상이 내 몰입 모드와 맞을까’를 스스로 물을 수 있게 된다. 취향의 판단 근거가 시스템 바깥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무엇을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좋아하는가. 이 질문이 자기 안에 자리를 잡을 때 사용자는 낯선 대상 앞에서 자기 반응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는 언어를 얻는다.
취향 발견을 돕는 상담이 겨냥해야 할 자리가 여기다. 좋아할 만한 것을 대신 골라 주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가 무엇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아차리는 감각을 함께 관찰해 주는 자리. 그러나 이 방향에는 반드시 짚어야 할 자기모순의 위험이 있다. 심리검사가 결과를 처방하는 순간, 그것은 알고리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될 뿐이다. 사용자는 여전히 자기 밖의 시스템에서 답을 받게 되고, 알고리즘에 취향을 위탁하던 구조가 이름만 바꿔 다시 돌아온다. 이 함정을 피하려면 심리검사는 답을 좁혀 주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 관찰의 언어를 제공하는 도구로 자리 잡아야 한다.
결국 취향은 알고리즘이 주는 것도, 심리검사가 결정해 주는 것도 아니다. 자기 처리 양식을 알아차리고 그 위에서 낯선 대상을 스스로 마주하는 시간의 축적이다. AI 시대에 심리상담이 개척할 새 영역은 답을 대신 골라주는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 고르는 회로를 되살리는 자리에 있다. 취향은 배달되는 결과가 아니라, 자기 관찰의 언어에서 자란다. 그리고 그 언어는 누가 대신 처방해 줄 수 없다.
한유진 | CASA 융합심리연구소 소장 | 한국아동미술치료학회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