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유엔 인간개발지수로 나타나
그래도 측정 못 하는 것 하나 남아

1962년 존 F. 케네디는 조국에 마감 시한을 하나 제시했다. 그 6년 뒤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경제가 측정하지 못하는 것에 관해 지금까지 쓰인 가장 훌륭한 말을 남겼다. 다만 누가 이를 제대로 확인해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6년 간격의 두 연설. 그중 단 하나에만 시한이 정해져 있었다.
1990년 유엔은 국가의 진보를 판단하는 새로운 숫자를 발표했다. 인간개발지수라 불렸다. 누군가 마침내 그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28년을 거슬러 텍사스의 한 풋볼 경기장으로 가야 한다.
1962년 9월 12일, 존 F. 케네디는 라이스대학 풋볼 경기장에서 4만 명 앞에 서서, 미국은 달에 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의 문장은 멋진 운율과 리듬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빛나게 만든 것은 그 밑에 깔린 내용이었다. 열여섯 달 전 그는 의회에서, 이 나라가 10년이 가기 전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무사히 귀환시킬 것이라고 말했고, 라이스에서 그 약속을 공개적으로 재확인했다.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시한이 정해진 것이었고, 예산항목이며, 결과가 둘 중 하나뿐인 시험이었다. 누구나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언제 확인할지도 모두가 알았다. 결과는 다섯 달을 남기고 달성됐다.
1968년 3월 18일, 캔자스대학은 수업을 취소했다. 이틀 전 대선 출마를 선언한 로버트 케네디는 그날 아침 캔자스주립대에서 연설하고 로렌스로 날아와, 오후 1시 30분 포그 앨런 필드하우스에 들어서서 2만 명의 학생 앞에 섰다. 그의 연설은 학생들의 환호와 박수로 38번이나 중단됐다. 연설 중간 어디쯤에서 그는 어떤 후보도 하지 않는 말을 했다. 회계 관행을 비판한 것이다.
국민총생산(GNP)이 연간 8000억달러를 넘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고는 그 숫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말했다. 대기오염, 담배 광고, 고속도로의 잔해를 치우는 구급차. 문에 다는 자물쇠와, 그것을 부수는 사람들을 가두는 감옥. 삼나무 숲의 벌목. 네이팜, 핵탄두, 경찰의 장갑차. 그다음에는 그 안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을 말했다. 아이들의 건강, 그들이 받는 교육의 질, 그들이 노는 기쁨, 결혼의 힘, 공직자의 청렴.
이것은 국민계정에 관해 누군가 쓴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이며, 견줄 만한 것이 없다. 이 문장들은 이 글 맨 위에 적힌 말로 끝난다.
6년 앞서, 라이스의 경기장에서, 그의 형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달에 가기로 선택합니다.” -존 F. 케네디, 라이스대학, 1962년 9월 12일.
같은 가문, 같은 본능이었다. 국가는 단순히 지금 측정하고 있는 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 문장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하나는 판결문 같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침서에 해당한다. 하나는 국가에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무엇을, 언제까지 지어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첫 번째 문장은 사람을 달에 올려놓았다. 두 번째 문장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국민총생산에 관한 대목은 당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특파원들은 베트남 기사를 송고했다. 그 대목은 수십 년에 걸쳐 천천히 유명해졌고, 지금은 ‘GDP를 넘어서자’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으레 거명된다. 그 연설을 한 지 11주 뒤, 로버트 케네디는 세상을 떠났다.
국민계정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국제규정집은 한 번 이상 전면 개편되었고, 1991년 미국은 케네디가 공격했던 바로 그 숫자를 퇴역시켜, 국민총생산 대신 국내총생산을 대표 지표로 삼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가 지적한 본질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의 비판은 국민계정의 지속적 개정에도 살아남아, 지금도 교과서에서, 학회 발표자료에서,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서 나올 경제성장 전망치로 눈 돌리는 장관들의 개회사에서 인용되고 있다.
로렌스 연설로부터 4주 남짓 뒤, 카라치에서 한 정부 경제학자가 연단에 올라, 자기 나라가 자축하는 ‘개발의 10년’이 산업자산의 66%를 22개 가문의 손에 쥐여주었다고 폭로했다. 마흐붑 울 하크는 케네디의 고발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같은 비판을 하고 있었다. 케네디는 권력을 원했지만 아직 갖지 못했다. 하크는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있었고, 그것을 써서 지금 자신이 해체하고 있는 바로 그 성장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한 명은 선거운동 중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고백 중이었다. 두 오후를 잇는 것은 계절뿐이다.
차이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하크는 21년을 들여 그 문제의식을 하나의 구체적 지표로 발전시켰다. 그는 정부를 떠났고, 아마르티아 센과의 논쟁에서 지고도 이겼으며,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첫 면담을 거절당하고 두 번째 면담을 위해 다시 찾아갔다.
1990년 그는 인간개발지수를 발표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사는가, 얼마나 교육받는가, 얼마를 버는가를 하나의 수치로 환산한 것이었다. 그 아래 130개국이 순위로 늘어섰다. 1인당 국민소득 400달러의 스리랑카가 6200달러의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높은 위치에 앉았다.
그것이 인쇄되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크가 보고서를 유엔 문서가 아니라 독립된 문서로 발간하도록 UNDP를 설득했기 때문이다. 그를 알던 메그나드 데사이는 유엔이라는 꼬리표를 독립성에 대한 ‘죽음의 입맞춤’이라 불렀다. 유엔 총회는 그 뒤 이 보고서가 유엔 공식 문서가 아니며 그 편집의 독립성이 유지된다는 점을 확인했다.
하크는 NASA가 존 F. 케네디의 연설에 해준 일을 로버트 케네디의 주장에도 똑같이 적용했다. 바로 숫자와 날짜를 준 것이다. 하크는 자신의 지수가 정확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외려 그는 지수가 무뎌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상으로 퍼져 나갈 만큼 단순하되, GNP처럼 마냥 인간의 삶에 눈을 감지는 않는 그런 지표. 캔자스에서의 연설이 그 이유를 말해준다. 케네디는 논리를 완벽하게 세웠지만, 구체적 실행 도구는 남기지 않았다. 그의 연설은 정부에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지수는 다른 방식으로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내년 예산서에 등장하는 것은 둘 중 하나뿐이었다.
보고서가 나온 지 8년 뒤, 하크는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무렵 유엔 사무총장은 그가 만든 보고서가 거의 200개국에서 국가별 판본의 모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숫자 하나. 사람 하나. 카라치의 그 오후와, 장관들이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그 표 사이의 21년. 존 F. 케네디는 달에 사람을 보내 달라고 요구했고, 그것을 얻었다. 마흐붑 울 하크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여 주는 숫자를 요구했고, 그것을 얻었다. 두 사람 모두 설득력이 있어서 응답받은 것이 아니다. 각자 검증 가능한 것을 명시하고, 그다음 자기 자신이 그 검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응답받을 수 있었다.
로버트 케네디가 시작했다고 여겨지는 운동은 이제 58년이 되었다. 그 운동은 대시보드와 프레임워크, 위성계정, 그리고 수많은 비판적 문헌들을 낳았다. 그러나 그 어떤 경쟁 지표도 GDP의 세계적 영향력에 견줄 만한 성과를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단 하나, 하크의 인간개발지수를 빼고는.
1968년의 교훈은 비판자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옳았다. 같은 해 봄에, 두 대륙에서, 두 번. 그렇지만 옳다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교훈은, 한 국가가 무엇을 측정할지 변화를 주고 싶은 사람은 직접 ‘측정 가능한 무언가’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세 남자 중 두 사람은 요구한 것을 얻었다. 얻지 못한 사람은 가장 아름답게 요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끝내 아무것도 명확히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측정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남아 있다.
다음 회에는, 새로운 도구 하나를 소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