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SMC가 첨단 공정으로 칩을 생산하고, 패키징 기업들이 여러 반도체를 연결하며, 폭스콘·콴타·위스트론 같은 기업들이 이를 서버와 시스템으로 완성한다. 대만은 AI 모델 자체보다 AI가 작동하기 위한 물리적 기반에서 강점을 가진 ‘AI 인프라 강국’에 가깝다.
그렇다면 왜 대만에서 TSMC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시작은 1970년대 대만 정부의 산업정책이었다. 당시 대만은 반도체 기술도, 세계적인 기업도 부족했다. 정부는 공업기술연구원(ITRI)을 중심으로 해외 기술을 도입하고 전문인력을 양성했다. 미국 RCA로 연구인력을 보내 반도체 설계와 제조기술을 익히게 했고, 축적된 기술과 인력은 이후 민간기업으로 이전됐다. 1980년 UMC가 설립됐고, 1987년에는 모리스 창을 중심으로 TSMC가 출범했다. 정부가 모든 것을 직접 생산한 것이 아니라, 초기 기술개발의 위험을 부담하고 민간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TSMC의 성공을 정부 지원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TSMC가 선택한 새로운 사업모델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반도체 기업은 설계와 생산을 함께 했지만, TSMC는 다른 기업이 설계한 반도체를 대신 생산하는 ‘퓨어 플레이 파운드리’에 집중했다. 특히 자체 반도체를 설계해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고객 입장에서는 핵심 설계를 맡기면서도 TSMC가 경쟁자가 될 것을 걱정할 필요가 적었다. 이러한 신뢰는 반도체 산업의 분업을 촉진했다.
그 결과 생산공장이 없는 기업도 설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엔비디아·AMD·퀄컴·미디어텍과 같은 팹리스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중요한 것은 TSMC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만에서는 미디어텍과 같은 설계기업, 패키징과 테스트 기업, 반도체 장비와 부품 기업이 함께 성장했다. 여기에 폭스콘·콴타·위스트론·인벤텍 등 PC와 전자제품 생산을 통해 축적된 제조역량이 결합됐다. 설계-제조-패키징-부품-서버로 이어지는 촘촘한 산업생태계가 형성된 것이다.
AI의 등장은 이 생태계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과거 반도체 경쟁이 얼마나 작은 회로를 만들 수 있느냐에 집중했다면, AI 시대에는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비롯한 여러 칩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연결하고 대량생산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 TSMC의 CoWoS와 같은 첨단 패키징 기술이 주목받는 이유다. 엔비디아가 뛰어난 AI 칩을 설계해도 이를 실제로 생산하고 패키징하며 서버로 완성할 제조 생태계가 없다면 AI 인프라는 구축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대만의 경쟁력을 단순히 “TSMC라는 세계적 기업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강점은 TSMC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업들이 전문성을 나누고 서로의 성장을 촉진하는 분업구조에 있다. TSMC가 성공했기 때문에 대만이 AI 강국이 된 것이 아니라, TSMC가 성장할 수 있었고 그 주변의 수많은 기업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생태계가 오늘날 대만을 세계 AI 공급망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대만의 경험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도 여기에 있다. 첨단산업의 경쟁력은 세계적인 기업 한두 곳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기술을 가진 기업이 쉽게 시장에 진입하고, 다른 기업의 생산능력과 연결되며, 한 기업의 성장이 새로운 기업의 기회가 되는 구조가 필요하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력은 ‘누가 가장 강한 기업을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얼마나 강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