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산업과 AI의 관계는 단순한 기술 채택 단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허범 금융위원회 비상임위원은 22일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열린 ‘2026 대한민국 여성금융인 국제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AI가 금융 가치사슬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AI의 창을 통해 바라본 금융의 세계’를 주제로 연단에 선 허 위원은 소매금융과 투자은행(IB) 자산운용 보험 등 전 영역에서 AI 기반 전환이 가속화하고 있다고 짚었다. 고객 발굴과 상품 판매는 물론 자산배분과 리스크 관리까지 핵심 기능 전반이 AI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허 위원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율형 ‘에이전트 AI’의 부상을 가장 큰 변화로 지목했다. 단순 업무 보조를 넘어 위험 회피와 포트폴리오 분산 등 복합 의사결정을 사람 개입 없이 수행하면서 감독당국에 새로운 화두를 던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AI 간 암묵적 담합 위험성을 경고했다. 각 금융사의 AI 알고리즘이 시장 데이터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이익 극대화를 좇다 보면 명시적 합의 없이도 자율적인 담합이 빚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현행 법체계로는 알고리즘 담합을 규율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AI 거래 전략에 맞춰 담합의 개념을 새롭게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도입에 따른 생산적 금융으로의 여신 패러다임 전환도 제시했다. 재무제표와 부동산 담보 위주의 대출 관행에서 벗어나 실시간 공급망 데이터와 거래 흐름 기술력을 평가해 자금을 공급해야 한다는 논리다.
허 위원은 “부동산 담보가 부족해도 기술력과 공급망 경쟁력이 입증된 혁신기업에 유동성을 적시 공급해야 한다”며 “금융 본연의 실물경제 견인 기능을 회복할 기회”라고 설명했다.
보안 체계의 패러다임 전환도 촉구했다. 외부 거대언어모델(LLM) 활용이 보편화된 환경에서 과거의 물리적 망분리 규제에만 기댈 수 없다는 지적이다. 데이터의 안전한 활용과 보안을 동시에 달성할 내부통제와 함께 AI 의사결정의 설명 가능성을 높이는 거버넌스 수립을 당부했다.
AI 투자 과열에 따른 금융시스템 리스크 전이 가능성도 짚었다. AI 기업의 고평가와 천문학적 인프라 투자 속에서 수익화가 지체될 경우 비은행권의 유동성 위기가 금융시장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다.
특히 급변하는 기술 발전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의 가치 하락 속도가 가파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허 위원은 “금융사가 부동산 담보인정비율(LTV)을 관리하듯 GPU에 대해서도 적정 담보가치 산정과 가이드라인을 선제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금융시장은 신뢰라는 자산 위에 서 있다”며 “속도 경쟁에 매몰되기보다 통제된 발전에 발맞추고 기술을 다루는 금융 리더의 시선은 언제나 사회적 책임과 인간 가치를 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