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연 기능 제치고 소비자 현혹 여전
‘가습기살균제 참사’ 교훈 잊지말길

우리 가전제품 시장의 풍경이 별나다. ‘살균’을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로 강조하는 가전제품이 넘쳐난다. 사실 에어컨·냉장고·공기청정기·정수기·세척기를 비롯한 거의 모든 가전제품 광고에 살균이 등장한다. 심지어 휴대폰과 비데도 살균을 내세운다. 칫솔·신발·마스크·옷의 살균을 위한 전용 가전제품도 있다. 살균의 방법도 다양하다. 살균제와 자외선(UV)도 쓰지만, 정체불명의 음이온·은나노·플라즈마·광촉매 살균도 있다. 이제는 ‘고온(열풍)·스팀 살균’까지 등장했다.
우리 경제가 본격적으로 좋아지던 1980년대부터 냉장고·에어컨·공기청정기와 같은 가전제품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경쟁이 치열했던 가전제품 시장에서 소비자의 눈길을 끌어야 했던 제조사들이 들고나온 궁여지책이 이제는 가전제품의 가장 확실한 마케팅 전략으로 굳어버린 것이다.
가전제품 본연의 기능보다 살균 기능이 더 중요해졌다. 과학적 근거는 철저하게 외면한다. 음이온·은나노·플라즈마·광촉매와 ‘99% 살균’이 모두 그렇게 등장한 억지·궤변이다.
모든 소비자가 가전제품의 살균 기능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제조사가 강조하는 화려한 살균 광고의 실제 효과를 의심하는 소비자도 많다. 실제로 제조사가 강력한 살균 기능을 자랑하는 얼음정수기에서 검은 곰팡이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얼음정수기가 처음 등장했던 10여 년 전부터 심심치 않게 알려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다. 그런데도 제조사는 지난 10년 동안 속수무책인 듯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소비자의 건강한 상식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세균·곰팡이는 물(수분)과 유기물(영양성분)이 있는 곳에서만 증식한다. 수분과 먼지를 확실하게 제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살균 방법이라는 뜻이다.
소비자가 가전제품의 내부를 수시로 관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별도의 살균 기능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 얼음정수기의 경우가 그렇다. 얼음 통과 토출구를 정수기의 다른 부분과 확실하게 분리하고, 소비자가 쉽게 열어서 수분을 닦아낼 수 있도록 해주면 될 일이다.
이제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가전제품 본연의 기능은 제쳐두고, 부차적인 살균 기능 광고에만 매달리는 가전제품은 과감하게 거부해야 한다. 그릇·옷·칫솔·신발에는 굳이 별도의 살균 기능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일상적인 방법으로 깨끗하게 씻거나 세탁해서 충분히 말리면 된다.
감염병이나 미세먼지 때문에 사용하는 마스크는 본래 일회용으로 생산된 것이다. 한 번 사용하면 폐기하는 것이 원칙이다. 마스크 살균기로 재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가전제품의 살균 기능이 소비자에게 언제나 안전한 것도 아니다. ‘살균이 당연히 안전하고 이로울 것’이라는 어설픈 믿음이 오히려 소비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괜한 걱정이 아니다. 15년 전에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바로 그런 믿음에서 시작된 비극이었다.
물건을 소독하는 용도로 개발된 화학적 살균제를 밀폐된 실내에 분무(噴霧)해서 소비자가 호흡으로 흡입하도록 만든 제조사의 살인적인 사용법이 문제였다. 살균·살생 성분을 실내에 퍼뜨려 흡입하게 만드는 방식은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낯선 과학 용어와 지나친 과장도 확실하게 거부해야 한다. 가전제품에서 음이온·은나노·플라즈마·광촉매의 살균 성능은 분명하게 검증된 적이 없다. ‘99% 살균’처럼 효과를 부풀리는 광고와 ‘허용기준’으로 위해성 논란을 덮으려는 태도가 모두 소비자를 무시한 억지·궤변이다.
더욱이 살균·살생 물질의 과도한 반복적 사용이 세균·곰팡이의 내성을 키워서 더욱 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항생제를 오남용하면 슈퍼박테리아가 생기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특히 실내 공기를 화학적으로 살균하는 가전제품은 경계해야 한다. 공기 중에 퍼진 살균·살생 성분을 소비자가 그대로 호흡으로 들이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로봇청소기의 걸레는 분리해서 가정용 세제로 세척 후에 충분히 말려서 써야 한다. 특별한 고온·스팀 살균이 필요하지도 않고, 특별한 세정·살균제가 필요하지도 않다. 정부의 적극적인 관리도 중요하다. 정부가 제조사의 억지·궤변에 끌려다니지 않을 만큼의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