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혈우병 치료제가 빠르게 발전하며 ‘출혈 제로(Zero bleeding)’ 등 새로운 치료 목표까지 제시되고 있지만 정작 환자들은 비용과 제도 장벽에 막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8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혈우병 환자의 건강권 보장 강화를 위한 건강보험제도 개선 정책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은 국내 혈우병 환자의 치료 접근성이 낮은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국가에서는 예방 치료를 표준으로 삼는 반면, 국내는 치료 목표와 급여 기준 간 괴리로 충분한 예방 치료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혈우병은 혈액 응고인자가 부족해 출혈이 반복되는 희귀질환으로 응고인자 활성도에 따라 중증도가 나뉜다. 일반적으로 응고인자 활성도가 1% 미만이면 ‘중증 혈우병’으로 분류되며 특별한 외상이 없어도 관절과 근육, 장기에서 자발적인 출혈이 발생한다. 반복 출혈은 관절병증과 신경학적 손상 등 비가역적 장애로 이어질 수 있어 예방 치료가 핵심이다.
한국혈우재단에 따르면 국내 혈우병 환자는 약 2300명 수준이며 이 중 절반 이상이 중증 환자로 알려져 있다. 중증 환자는 반복적인 관절 출혈로 관절 기능이 지속해서 악화하며 진단 후 5~10년 내 기능 저하가 진행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국내 혈우병 환자의 45%가 관절병증을 동반하고 있으며 환자들의 생명과 삶을 위협하는 유전적 희귀질환이다.
박정아 인하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혈우병 치료는 과거 ‘출혈 시 대응(on-demand)’에서 ‘출혈을 예방하는 예방요법(prophylaxis)’ 중심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됐다”며 “최근에는 ‘무출혈(Zero bleeding)’과 정상에 가까운 삶까지 치료 목표로 제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치료 패러다임이 ‘사후 대응’에서 ‘사전 예방’으로 바뀌었지만, 현장에서는 신약 접근성 부족이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 박 교수는 “예방 치료를 권유받은 환자가 약값이 한 달 200만원에 달한다는 이유로 치료를 포기한 사례가 있었다”며 “이후 반복적인 출혈로 입원을 반복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해외에서는 무상 또는 저비용 치료가 가능한 환자가 국내에서는 본인부담금 때문에 치료 횟수를 줄이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정우 연세암병원 소아혈액종양과 교수는 국내 제도를 해외와 비교하며 “한국은 신약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에 따르면 미국·유럽·일본 등 주요 국가에서는 의사가 환자 상태에 따라 치료 용량과 투여 횟수를 자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지만 국내는 급여 기준과 처방 한도가 엄격히 제한돼 환자 맞춤 치료가 어렵다.
한 교수는 “해외는 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도 환자 치료 접근성을 적극 보장하는 반면, 한국은 약 사용 자체를 제한하는 구조”라며 “결국 신약이 있어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내는 출혈 이후 치료하는 구조가 고착화돼 예방 치료 중심의 글로벌 기준과 괴리가 크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는 희귀질환 치료제의 신속한 건강보험 등재, 급여 기준 개선,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본인부담금 완화 등이 주요 개선 과제로 제시됐다.
이남일 한국코헴회 사무국장은 “현행 희귀질환 의료비 지원 제도는 부양의무자 소득·재산 기준으로 인해 치료 중단과 합병증, 장애 누적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혈우병 치료제 급여 용량이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 용량에 미치지 못해 충분한 예방치료도 어렵다”며 “0.1% 수치 차이로 중등증으로 분류된 환자도 중증 수준의 출혈을 겪는다. 급여 기준은 수치가 아닌 실제 출혈 양상과 임상 증상 중심으로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